● 용서받지 못한 자
軍시절, 그 끝나지 않은 추억의 잔재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키워드는 한마디로 지독한 성장통이다.
그들의 모습이 안쓰럽고 여전한 현실이 섬뜩하다.
그렇다고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맞부딪쳐야 할 군대문제. 간 사람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가지 않은 남자도, 심지어 애인으로, 누나이자 동생, 어머니 등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느닷없는 이별을 해야 하는 여자들조차도 군대는 피해갈 수 없는 고민을 던져 주는 화두다.
군대 내 폭력성을 다룬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이 극단적인 감정을 끌어올려 간혹 남의 나라 이야기려니 생각할 수 있었다면, 26살 젊은 감독이 들여다 본 군대는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폭넓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미덕이 있다.
비록 그 미덕이 우리의 가슴을 헤집어 놓지만 말이다.
10회 부산영화제 최대 화제작.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작품에 불과했던 이 영화는 평단과 관객의 시선을 순식간에 휘어 잡는 문제작이 됐다.
윤종빈 감독이 고백하듯 풀어 놓는 또래들의 성장통은 마치 한편의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 같다.
제대한 지 1년 지난 태정에게 군복무중인 친구 승영이 찾아 온다. 굳이 만나려 하는 승영의 태도가 못마땅해 여자친구까지 불러 내 자리를 회피하려 하지만 승영은 계속 그날 밤 태정을 쫓아 다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일까.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최고참 병장 태정의 내무반 신병으로 중학교 동창 승영이 들어 온다. 27살 명문대생인 승영은 군대의 부조리가 마뜩찮다. 말대꾸하고 고참들의 짓궂은 장난을 그냥 보지 못하니 고문관이 따로 없다.
친구인 태정이 은근히 감싸주지만 역부족. 그런 상황에서 승영은 자신과 거의 비슷한 후임 지훈을 받는다. 지훈을 감싸고 돌지만, 승영 역시 시간이 지나며 지훈이 답답해진다. 애써 승영은 지훈을 보호하긴 하지만 어느덧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고참들의 모습을 닮아간다.
영화는 시종 군대란 전쟁터 같은 세상의 한 단면임을 놓치지 않는다. 무언의 폭력과 부조리한 질서가 있지만 거기에도 사람 사는 정이 있고 각자의 개성이 있으며, 대중이란 이름으로 허용하지 않는 부적응자가 있다. 객석은 폭력을 비난하지만, 때론 그 폭력을 용인하는 심정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그 감정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긴 홍역을 앓고 난듯 그 지독했던 군생활도 세월이 지나면 그저 침이 튈만큼 열정적으로 반추할 수 있는 추억이 되며, 정글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정글의 법칙을 따라아 하는 것을.
윤종빈 감독이란 샛별은 물론 이 영화는 우리에게 눈에 반짝 띄는 신예 배우 하정우와 서장원을 소개했다.
특히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전도연의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로 등장하는 하정우는 드라마에서 보이는 다소 딱딱한 몸놀림과 달리 마치 자연스러운 일상을 표현할 줄 아는 관록 있는 배우처럼 카메라 앞에 서는 놀라움을 보여줬다. 카메라에 좀 더 익숙해지면 썩 괜찮은 배우로 자랄 것이란 기대감이 생긴다.
두 사람은 각각 김용건과 서인석의 아들이란 꼬리표가 없어도 앞길이 창창할 것 같다.
윤 감독도 지훈으로 출연해 연기까지 겸했다. 18일부터 CGV인디상영관과 동숭아트센터 등 전국 20개 스크린에서만 만날 수 있다. 15세 이상 관람가.
● 나의 결혼원정기
농촌총각 ‘색시 찾아 삼만리’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순박한 38살 농촌 총각 한만택(정재영 분)이 자신의 결혼 성공기를 온 국민에게 자랑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가슴이 순간 뜨끔해지고 순수한 사랑에 흐뭇해진다.
제10회 부산영화제 폐막작으로 선택된 영화답게 작품의 수준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에다 보면 후회하지 않을만큼 재미와 감동이 따라온다. 무엇보다 정재영과 유준상 등 두 배우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관록과 호흡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종종 새벽에 일어나 몰래 팬티를 빨아야 하는 한만택은 환갑이 넘은 홀어머니에게 여전히 할아버지의 밥상을 차리게 하는 노총각이다. 여자를 적극적으로 만나긴 커녕 사춘기 시절 쓰라린 기억 때문에 여자와 눈도 맞추지 못하는 순진한 남자다.
만택의 친구 박희철(유준상 분)은 시골 예천의 택시기사. 바람둥이라고 자처하지만 좋아했던 여자가 대구로 시집간 후 결혼한 옛 여자나 어쩌다 만나 껄떡거리는 실속없는 노총각이다.
애꿎은 개에게나 화풀이하고 술에 취해 마을회관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부르는 손자를 안쓰럽게 생각한 할아버지의 결단으로 두 남자는 결혼의 희망이 엿보이는 우즈베키스탄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쭉쭉빵빵한 여자를 원 없이 만난 희철은 정신 못차릴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지만, 만택은 거기나 여기나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똑같다. 오히려 고려인이란 통역관 라라(수애)에게 은근히 마음이 간다. 라라에겐 만택의 결혼을 꼭 성사시켜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결혼중개업소 사장이 만택에게 결혼을 빙자해 한국으로 넘어가려는 여자를 소개하라고 해도 양심을 접어둔 채 나서게 된다.
영화는 라라가 만택의 진실한 마음을 느끼면서도 왜 무리수를 두는지 은근히 내비치고 만택과 라라가 점점 더 진심으로 접근하는 과정을 보여 주면서 관객들의 공감을 얻는다.
지난 2002년 1월 소개된 KBS ‘인간극장-노총각, 우즈벡에 가다’를 보고 황병국 감독이 기획한 이 영화는 단순히 결혼하기 힘든 농촌 노총각문제만 짚지 않는다. 화면에 잠깐씩 등장하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한국행은 이주 노동자문제도 건드리고 라라를 통해 탈북자들의 현실도 소개한다. 무거울 수 있는 이 소재들은 배우들의 호연으로 잘 버무러져 있다.
정재영과 유준상은 누가 봐도 예천 사는 노총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무장한 정재영의 연기는 물론 능글맞으면서도 영화의 정점을 함께 책임지는 유준상의 연기가 돋보인다.
수애는 강약이 잘 배인 다양한 표정으로 관객들을 흡입한다. 함께 웃고 간혹 눈물을 찔끔거리다 극장 문을 나서면 짧은 순간이나마 반성문을 쓰게 만든다. ‘집으로…’와 ‘가족’을 만든 제작사 튜브픽쳐스의 지향점이 잘 드러난다.
김성수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황병국 감독은 첫 데뷔작에서 합격점을 받았다. 자칫 판에 박힌듯 교육적으로만 흘러 갈 수 있는 소재를 현실적인 코믹 코드를 섞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상업영화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참, 영화를 보면 “다 자빠뜨려!”란 말의 느낌이 달라질 것이다. 13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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