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覺國師

진각국사(1307·충렬왕 33~1382·우왕 8)는 고려시대의 고승이다. 흥해(지금의 경주)출신으로 1319년 출가하여 화엄종 반룡사주(盤龍社主) 일비(一非)를 은사로 득도하였다. 이때 화엄종뿐만 아니라 참선에도 힘써 선지(禪旨)에도 통달하였다. 1325년 승과에 급제하였고 그 뒤 김생사·부인사·덕천사·개태사 등지에서 수행하다가 1364년(공민왕 13) 중국 항저우(杭州) 소재 휴휴암(休休庵)에 이르렀다. 1366년 성안사의 만봉시위를 만나 가사(袈娑)와 선봉(禪棒)을 전해 받고 귀국, 치악산에 머물렀다. 1367년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대지무애 성상원융(大華嚴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大智無碍 性相圓融)’이라는 법호를 내리고 국사(國師)로 봉하였다.

당시 왕사(王師)였던 나옹(懶翁)과 함께 선교(禪敎)의 공부시관(功夫試官)을 맡았으며, 신돈(辛旽)과도 친분이 깊었다. 1372년 공민왕의 명으로 경북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주지가 되어 무량수전(無量壽殿) 등 퇴락한 당우와 가람을 보수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뒤 금강산·오대산 등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382년(우왕 8) 수원 광교산 창성사(彰盛寺)에서 입적하였다.

광교산에는 ‘여든 아홉 암자’가 있었다. 지금의 용인시 신봉동쪽 광교산중에 있었던 서봉사(瑞峯寺)에서 고려 인종의 아들이었으나 승려가 된 현오국사(玄梧國師·1127~1179)가 일찍이 불사를 마련했고, 수원쪽 창성사에는 진각국사가 생애 마지막까지 거처하였으니 광교산에 ‘89암자’가 있었음은 전설이 아니다. 더구나 현오국사와 진각국사 두 고승은 부석사 출신이다. 지금은 절터와 현오국사탑비(보물 제9호), 진각국사탑비(보물 제14호)만 남아 있지만, 서봉사와 창성사의 규모가 우리나라 고건축물 중 최고로 꼽히는 부석사와 비견될 만하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을 펼치기 위해 왕명으로 세운 부석사 주지를 진각국사가 역임했기 때문이다.

광교산사랑 시민운동본부가 최근 개최한 학술세미나에서 염상균 역사탐방연구회 이사가 밝힌 영상자료를 보면 창성사터 주위에서 대 승가람마(僧伽藍摩)의 축대가 분명한 석재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감로수가 마르지 않고 샘 솟는다. 광교산을 길이 보전해야 할 당위성이 진각국사탑비와 창성사터에도 서려 있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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