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의 ‘자유’

이탈리아 사람 자고모 지롤라모 카사노바(1725 ~ 1798)를 사람들은 ‘세기의 로맨티스트’ ‘쾌락주의자’ ‘희대의 호색한’이라고 부르지만 그는 불가사의한 생애를 살았다. 카사노바의 삶을 연구하는 김준목씨는 그를 ‘감각의 순례자’라고 표현했다.

희극배우인 아버지와 구두수선공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그는 타고난 천재성을 발휘하여 신분의 제약을 극복하고 상류사회로 직행했다.

18세에 명문 바도바대에서 법학박사가 됐고 히브리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를 구사했으며 문학,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의학, 패션, 스포츠, 요리, 마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200㎝의 장신에 직업도 외교관, 재무관, 저술가, 연극배우에서 도박사와 스파이까지 실로 다양했다. 황금구슬과 오렌지 껍질을 이용한 피임술의 대가였고 파리에서 복권사업을 처음 시도한 벤처사업가이기도 하다. 한때 신부(神父)수업을 쌓았으며 또 군인, 바이올리니스타가 되려고도 했지만 추문에 연루돼 투옥됐다가 1756년 탈옥한 뒤 방랑생활을 하며 모든 재능을 여인의 마음을 빼앗는 데 쏟아 부었다.

카사노바는 일찍이 이성에 눈을 떴다. 갓 열 살에 스승의 여동생과의 사랑을 시작으로 수녀와의 금지된 관계, 친딸에게 구혼을 하는 광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40여 년간 100여 명의 여인과 외줄타기 로맨스를 벌였다.

다른 바람둥이인 모차르트나 볼테르와 카사노바가 다른 점은 모든 연애사를 서술해 후세에 기록으로 남긴 점인다. 로마와 파리에서의 화려했던 젊은 날을 뒤로 하고 프라하에서 도서관 사서로 40여 권의 책을 집필하며 인생의 황혼기를 보낸 카사노바는 73세에 누구 하나 지켜주는 이 없이 홀로 생애를 마감했는데 그는 “나는 여인을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는 말을 남겼다. “즐겁게 보낸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 권태로운 시간만이 낭비일 뿐이다”라는 말도 세상에 던지고 떠났다.

한 인간이 어떻게 그처럼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 조차 힘든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카사노바와 사랑을 나눈 100여 명의 여인들은 “내가 진정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는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 임병호 논설위원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