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 대부서 ‘경기號 선장’으로
1년 가까운 길고 긴 장도(長途)끝에 한나라당의 김문수 경기지사 당선자는 10년 넘게 살아온 부천 소사구의 작은 아파트를 떠나 수원시 팔달산 자락에 둥지를 틀게 된다. ‘냉철하고 합리적 사고’, ‘가난한 국회의원’, ‘강직한 성품과 고집’ 등의 수식어들이 따라붙는 김 당선자는 지난 94년 신한국당 입당 이후 단 한 차례도 실패하지 않고 승승장구, 이제 민선 4기 경기호(京畿號)의 선장으로 4년간의 임기에 들어간다.
◇어린 시절
김 당선자는 1951년 경북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에서 무너진 경주 김씨 가문의 4남3녀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공무원으로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갖고 있는 집안 분위기 탓이었는지 김 당선자는 중학교 1학년때 서당까지 다닌 경험이 있다.
문중의 대부였던 아버지는 월급을 포함해 가진 돈이 있으면 문중 관련 일에 우선 사용하더니 결국은 문중 친척의 빚 보증을 잘못 서 집과 월급을 모두 차압당하고 판잣집 단칸방으로 쫓겨가게 된다. 빚에 쫓겨서인지 김 당선자 가족은 황강리에서 영천읍으로, 또다시 대구 남산동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없는 살림에 자식들 학교 때문에 이사를 가다보니 김 당선자 가족은 이사 때마다 더 낡은 집으로 옮기게되고 결국 구멍난 천장으로 밤하늘의 별을 보게 된다.
김 당선자는 “고등학교 다닐 때 번듯한 대구 남산동으로 이사했지만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만 초가집 두칸에 판잣집 한 칸이었다”라며 “방에 누우면 구멍난 천장으로 밤하늘의 별이 보일 정도”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김 당선자는 그 당시를 생각하면 선생님들의 가정 방문이 제일 싫었고 친구들을 절대 집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공부는 잘했던 김 후보는 경북지역 최고의 명문으로 통했던 경북중학교에 입학한 후 경북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서울대학교 입학을 최고 목표로 삼게 된다.
◇노동 운동의 시작
고등학교 3학년. 3선 개헌 반대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김 당선자는 친구들과 시위에 참여했다가 정학을 받게 된다.
한달 간의 정학기간이었지만 김 당선자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 상태에서 아무도 정학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점’에 다소 당황스러우면서도 사고의 폭을 넓혀갔다.
한달간의 정학까지 맞는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 당선자는 집안의 보배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했던 집안 사정은 김 당선자에게 대학 새내기로서의 기분을 안겨주진 못했다.
그러던 중 대학 1학년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 김 당선자는 가난을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바라보게 된다.
사회의 모순을 인식한 김 당선자는 이후 가슴 속에 ‘혁명’이란 글자를 새기게 된다.
◇노동 운동과 결혼, 그리고 가족
71년 여름 김 당선자는 공장에 취업한다. 구로공단 옆 안양천 둑방길 근처에 있던 드레스 미싱 공장이 김 당선자의 첫 직장이었다.
이후 동대문 시장 피복공장, 통일상가 재단보조를 거쳐 한일공업주식회사, 금속노조 남서울지부 청년부장으로 김 당선자는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의 권리 회복을 위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 당선자는 현재의 아내 설난영 여사를 만나게 된다.
금속노조 남서울지부 청년부장과 여성부장인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이념과 사상, 이상과 현실이 아닌 인간적 사랑의 결정체인 한 가족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이름만 가족일 뿐 한 집에 모여 따뜻한 밥 한번, 놀이공원 한번 가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고 노동운동가 남편과 아내의 결합은 그 자체로서 세속적 사랑 놀이 따위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노동자 복지협의회 활동과 대우자동차 파업 등 노조활동, 국군보안사령부로 끌려들어가 감옥살이 했던 시간이 결혼 후 대부분의 시간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때문인지 김 당선자의 가족 사랑은 남다르고 딸 동주양에 대한 감정은 애틋하기로 소문나 있다.
◇정치에 뛰어들다
김 당선자가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지난 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서다.
이에 앞서 김 당선자는 90년 이재오 현 한나라당 원내대표 등과 민중당을 창당, 14대 총선에 나섰지만 단 한 석도 얻지 못한 채 현실정치의 쓴 맛을 보기도 했다.
이후 94년 김 당선자는 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 재야 인사들로부터 ‘변절자’로 비난 받으면서까지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노동운동의 대부가 야당이 아닌 여당의 품에 안기게 됐다는 사실 하나로도 세간의 주목을 끌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 당선자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시점에서 노동 운동의 관점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면서 “변절이 아닌 또다른 발전을 위한 기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권에 발을 딛게 됐다”고 입당배경을 밝혔다. 그는 현재도 이같은 결심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또 96년 4월 15대 총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누르고 당선의 영광을 차지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김 당선자는 맨 얼굴로 유권자들과 1대 1 접촉을 통해 쉼없이 만나고 또 만나고를 반복한 결과로 평가받고 있다. 선거가 끝난뒤 없어져 버린 구두 뒷굽은 이제 정치신인들에게 고전(古典)으로 여겨지고 있다.
◇국회의원 김문수
부천소사에서 내리 3선에 성공. 10년간의 국회의원 활동은 김문수의 인지도를 높여놓는 결과를 낳았다. 꼬장꼬장한 성격, 빈틈없는 논리, 청빈한 생활은 한나라당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국회의원이 아니었고 ‘가난한 국회의원’은 어딜 내놔도 상대당의 공격에서 자유로웠다.
그래서인지 야당의 저격수로 최전선 첨병으로서의 국회의원상(像)은 김 당선자의 의정활동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각종 청문회, 대통령 친·인척 비리 폭로 등을 통해 김 당선자는 당내에서 그 진가를 서서히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김 당선자의 3선 비결은 전국적 인지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 지인들의 평가.
초선 국회의원 시절 ‘지옥철-대통령도 함께 타봅시다’라는 홍보물을 통해 경인전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을 시작으로 각종 지역현안을 주민들의 입장에서 풀어가게 된다.
국회의원이 혼잣 몸으로 시장통과 상가, 거리를 누비며 만난 주민들의 애환을 듣고 메모하고 공부하는 생활의 반복이 허허벌판 부천 소사에서 3선 국회의원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경기도지사로서의 새로운 삶
지난해 7월 김 당선자는 경기도지사 도전을 결심하게 된다.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반대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김 당선자는 “어느 순간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1천년 역사상 한민족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망국적 수도 이전을 막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다”면서 “손학규 지사에게도 인간적인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대한민국의 살 길을 만들기 위해서 경기도를 대한민국의 성장 엔진으로 만드는 것 밖에 길이 없다고 확신했다”고 출마배경을 설명했다.
이후 수도권 문제에 대한 더 깊은 고민에 빠져들게 된 김 당선자는 수도권 규제 철폐 등 경기도 발전을 위한 다양한 노력과 갖가지 방안들을 제시하게 되고, 당내 경선을 거쳐 한나라당 경기지사 후보로 확정된다.
그리고 단 한번의 도전으로 경북중학교 동창으로 정통부 장관 출신의 열린우리당 진대제 후보를 누르고 경기지사에 당당히 당선됐다.
같은 당 소속의 손학규 지사의 뒤를 이어 도백(道伯)의 자리에 오르게 된 김 당선자는 “4년을 한결같이 일하는 일꾼 도지사로서 매순간을 맞이할 것”이라며 “31개 시·군 어디나 살기 좋은 경기도를 만드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김동식기자 dosikim@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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