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장에서 꿈꾸는 화엄문화

정 수 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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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묘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내 이웃에 혐오시설을 두지 않으려는 심리는 여전하다. 집단이기주의 비판은 다른 동네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아쉬울 땐 이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기피라니, 이기적인 삶의 방식이 심각한 수준이다.

그런데 이즈음의 장묘시설을 기피 대상으로 치면 건물이나 공간이 억울할듯 싶다. 그만큼 건축미도 상당한데다 쾌적하고 세련된 공간으로 망자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갖추는 좋은 공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기피니 혐오니 하는 딱지를 떼지 못하는 건 왜일까. 무엇보다 ‘장묘’에 따른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한때 ‘4’가 ‘사(死)’를 연상시킨다고 기피하던 이상한 관행이 있었다. 그것은 인식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사라졌는데, 장묘시설도 변화를 이끌어 내는 운영방식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장묘공간을 일정 부분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물론 장묘시설은 망자에 대한 극진한 예의와 함께 이에 따른 편의나 쾌적함이 우선일 것이다. 거기다 예술적 아름다움을 더한다면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여 공연을 하되, 엄숙한 장례식장에 걸맞게 삶과 죽음을 더불어 성찰할 수 있는 그런 것을 하면 별 문제가 없을 듯하다. 죽음의 분위기만 침통하게 감도는 것보다 그것을 포용하며 삶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이 병행되면 장묘시설들도 더 친근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실은 몇 년 전 수원연화장에서 그런 아름다운 모의를 한 적이 있다. 가칭 ‘연화장 프로젝트-경계를 넘어’로 각 분야의 예술인 몇 분이 모여 새로운 시도를 꿈꿔본 것이다. 이는 훌륭한 장묘시설을 또 다른 의미 있는 예술공간으로 확장해갈 순 없을까 하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우선 문학과 음악, 미술, 무용 등의 교섭을 통한 추모 공연으로 계획을 세웠다. ‘경계를 넘어’, 즉 삶과 죽음, 산 자와 망자, 고정관념의 벽 그리고 예술 장르간 경계 같은 것을 다 넘어 화엄세상의 꿈을 펴보자는 것이었다. 제법 의미 있는 일이 될 듯해 구체적인 계획까지 진행하던중 사정이 생겨 아쉽게도 후일로 미뤘다.

장례도 하나의 문화다. 그리고 장례식은 우리의 문화 전통으로 보면 일종의 축제였다. 만장을 앞세운 채 꽃상여를 메고 산으로 올라가던 행렬은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답던가. 망자를 묻으며 부르는 노래나 어떤 행위들, 그리고 상여같은 것은 또 얼마나 슬프고도 아름답던가. 그런 것들은 모두 망자를 위한 것인 동시에 산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망자를 극락으로 보내려는 지극한 예의이자 남은 사람들을 추스르는 삶의 한 절차이다. 아무리 절통한 죽음이라도 그 옆에서 곡을 하고 밥을 먹듯, 남은 사람은 또 남은 날들을 어기차게 살아가야 하니까 말이다.

지금은 발상의 전환이 긴요한 시대다. 장묘시설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속도로에서 연화장을 본 사람들이 무슨 박물관이냐고 물을 때마다 그것을 본래의 용도에만 한정하는 게 아까웠다. 장묘시설도 공유시설이니 많은 사람이 누려야 한다. 그곳에 새로운 문화를 입히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장례나 추모에서, 나아가 우리네 일상을 위로하는 좋은 장소가 될 것이다. 망자와 더불어 산 자들의 통찰을 이끌어내는 문화공연이라면, 우리가 한번 꿈꿔볼 만한 멋진 일이 아닐까.

/정 수 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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