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천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홍석천(36). 그의 이름 석 자가 대한민국에서 갖는 상징성은 매우 강렬하다. 그는 연기자이지만 언제부터인가 그의 앞에는 항상 특정한 수식어가 붙어다니며, 사람들 역시 그를 연기자로만 보지 않는다.

6년 전 그가 유명인 최초로 '커밍아웃'을 단행했을 때 대한민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수면 밑에만 있던 세상과 삶이 햇볕 아래로 드러나자 그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일었다. 그러나 6년 후 지금은 그때에 비해 세상이 무척 많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에서도 '퀴어 영화제'라는 말, '동성애자의 인권'이라는 말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홍석천은 '최초'라는 십자가를 진 탓에 여전히 앞장서서 세상의 편견과 맞서 싸우고 있다. 특히나 연기자로서 그것은 무척 큰 핸디캡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그는 꿋꿋하다. 14일 개봉한 영화 '두뇌유희 프로젝트, 퍼즐'(감독 김태경, 제작 눈엔터테인먼트)이 반가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그의 모습 때문이다.

"그동안 정말 숱한 작품들이 캐스팅 최종단계에서 제 손을 떠나갔습니다. 그만큼 아직도 저를 캐스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저 때문에 투자가 안되고, 제작이 안된다니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이번 영화는 저를 찾아왔습니다."

'두뇌유희 프로젝트, 퍼즐'에서 그는 주연이다. 문성근, 주진모, 김현성, 박준석과 함께 다섯 명이 공동 주연인 이 영화에서 그는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과격한 마초 '노'를 연기했다. 주연이라는 점도 눈길을 끄는데, 마초 캐릭터다.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이미지로 어필해온 그로서는 파격 변신이다.

"처음에 섭외가 왔을 때는 농담하는 줄 알았어요. '이 사람들이 장난치나' 싶더라구요. 그런데 감독님이 '고정관념을 깨고 싶다'고 하더군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다니고, 말끝마다 욕을 하는 '노'를 연기하면서 홍석천은 꾹꾹 눌러담았던 마음 속 응어리를 꺼내보이게 됐다.

"희열을 느꼈습니다. 예전에는 제게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이거든요. 항상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제게도 왜 어두운 면이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평소에는 그것을 죽이고 살았고 그로 인해 답답함이 많았는데, 이번에 '노'를 연기하면서 제 속의 '욱'하는 감정들이 솟아나오더군요. 저 스스로도 참 신기했어요. 연기하는 동안은 그런 모습을 현실에서도 유지하려고 하니 평소 같으면 백번 참고 넘어갔을 일에도 맞바로 대응하는 경우가 생기더군요. 상대도 놀라고 저도 놀라는 일들이 벌어지곤 했는데 솔직히 되게 시원했어요.(웃음)"

동료 배우 문성근이 그의 인간성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은 것을 봐도 알 수 있지만 홍석천은 웬만한 사람은 감당하기 힘든 아픔에도 불구하고 늘 밝은 미소로 사람들 앞에 선다. 그런 그이기에 비록 연기이긴 하지만 '노'를 만난 것은 그에게 세상에 대한 살풀이의 기능을 했다.

"제가 커밍아웃을 한 것은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로 인한 충격을 각오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연기도 그만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오기가 생기더군요. 같은 동성애자들까지도 저를 욕하는 것을 보고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동성애자들에게 주의를 환기할 수 있다면 저 하나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커밍아웃하고 났더니 저보다 더 잘난 사람이 커밍아웃했어야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더군요."

이로 인해 그는 연기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곳곳에 놓인 편견과 싸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건재를 알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커밍아웃 전과 후의 상황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 전에는 나름대로 연기자로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위치였지만 그 후에는 출연 자체가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김수현 선생님 덕분에 드라마 '완전한 사랑'으로 연기에 복귀하고 '슬픈 연가'까지 찍었어요. 그런데 그러기까지의 과정은 너무 힘겨웠습니다.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연기를 해야 할까' 싶은 생각도 들고, 나를 캐스팅하려는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내 욕심만 채우려는 게 아닌가 회의가 들더군요. '나 하나 연기 안 하면 그만인데' 싶은 거죠."

편견과 맞서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이런 식으로 꺾일 무렵 찾아온 것이 바로 '두뇌유희 프로젝트, 퍼즐'이다.

"처음에는 이 영화만 끝나면 연기를 그만두자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역할, 이런 비중의 연기까지 했으면 나로서는 누릴 만큼은 다 누렸다고 생각한 거죠. 그냥 가끔 내가 좋아하는 연극이나 하면서 살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노'를 연기하면서 저를 다시 돌아봤고, 오랜만에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인생에 자신감도 생겼구요. 아마도 '노'를 통해 세상에 대해 실컷 욕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웃음)"

물론 앞으로도 출연은 여전히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안다. 그래서 계획을 다시 세웠다.

"무작정 기다리며 속을 태우기보다는 제 역량 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내년 초에 대학로에 연극 한편 올릴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런 식으로 생각을 전환, 저 자신을 좀 편하게 하려고 합니다. 물론 출연 섭외가 들어오면 감사하게 응해야죠."

이제는 남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말.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 홍석천의 선한 본성이 다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에 위트 있는 말을 던졌다.

"이번에 제 연기 어떠셨어요? 그래도 물에 기름 뜨듯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다음 작품은 참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격려의 의미에서 남우 신인상 후보라도 안될까요?(웃음)"

홍석천. 그의 이름 앞에 연기자 외의 불필요한 수식어가 붙지 않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해본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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