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김 “한창때 재벌2세 유혹 많았지만 다 거절했죠…난 돈 못번 가수”

‘최고의 국민가수’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패티 김. 예순 아홉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이다. 1959년 데뷔한 이래 그는 노래 부르기를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는 40년 이상 차이 나는 후배 가수들과 한 무대에 서서 가창력을 과시한다. 그가 지금껏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비결은 자신을 젊게 가꾸는 노력이었다. 9월 29일∼10월 1일 서울 충무아트홀의 ‘객석으로…’ 공연을 앞둔 그를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만났다.

-‘패티 김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결은 무엇인가요?

△가수로서 자신을 관리하기 위해 많이 노력해요. 둘째 아이 낳은 뒤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운동을 하고 있죠. 가수는 스테이지 가수와 레코딩 가수로 나눌 수 있는데,저는 스테이지 가수에요.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내 자신을 온전하게 보여주려면 자신을 관리하는데 열심인게 당연하죠.

-만만치 않은 나이인데요. 노래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오히려 예전보다 지금이 더 좋습니다. 훨씬 깊이가 있고 멋있어졌다고 할까. 젊었을 때는 제가 굉장히 고음이었어요. 그래서 아마 나 이만큼 잘한다며 자랑도 많이 했을거에요. 그렇지만 경험이 없으니 멋은 없었을 거에요. 난 여자가 정말 아름다운 것은 30대부터라도 생각해요. 아이도 낳고 자신을 가장 잘 알게 되는 나이거든요. 요즘엔 10대나 20대 초반을 섹시하다고 하는데,나이든 사람이 보기에는 안어울려요.

-세종문화회관이나 대형 운동장 등 초대형 공연장에서 관객들을 만나다가 지난해부터 800석 안팎의 작은(?)공연장에서 콘서트를 여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패티 김 하면 도도하고 접근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잖아요. 사실 스타는 신비로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무대를 제외하면 별로 나서지 않았지요.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스스로 자처했으니까. 광고도 일생에 한번 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데뷔 30주년을 마친 뒤 이제 관객에 친밀하게 다가가자라는 생각을 했어요. 너무 오랫동안 그러질 못해서 내 자신을 바꾸는데만 10년 넘게 걸리더라구요.

-공연은 1년에 몇 회나 하고 연습은 얼마나 하십니까?

△1년에 12∼15회 정도 공연해요.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제 연배 가운데서는 유일하죠. 연습은 늘 하는 편이구요. 공연을 바로 앞두면 악단과 함께 연습하는데요. 제가 워낙 완벽주의자라서 까탈스럽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하지만 패티김 이름 석 자를 보고 오는 관객들에게 최상의 공연을 보여주려면 너무나 당연한거죠.

-오랫동안 가수 생활을 하셨으니 돈도 많이 버셨을 것 같은데요.

△명예를 얻은 것에 비하면 나는 굉장히 돈을 못번 가수에요. 그동안 너무 출연을 가렸거든요. 예전에는 밤 업소에 다니는게 가장 큰 수입원이었는데 안했으니까. 나는 돈보다는 훌륭한 가수로 한국 가요사에 남고 싶어요. 누구나 인정한 그런 스타이고 싶은거죠. 사실 돈벌려고 마음 먹었으면 꽤 많이 벌었겠죠. 그리고 한참 인기있을 때 돈많은 남자에게 시집갔지 가난한 연주자(고 길옥윤 씨)랑 결혼했겠어요? 그때 재벌 자제들로부터 유혹이 많았지만 다 거절했어요.

-후배들에게 충고를 해주신다면 뭐가 있을까요?

△몇달 반짝하거나 돈버는게 목적인 가수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가수들마다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고 매니저가 시키는대로 하니까 그게 어려운 것 같아요. 예전과 비교해 우리 가요계가 너무 상품화된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그래도 예전보다 대중음악의 위상이 많이 높아지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제가 예전에 대중가수로는 처음 서울시향과 협연을 할 때 참 속상했어요. 저를 초청했지만 당시 연주자들의 얼굴에는 저를 무시하는 눈빛이 가득하더군요. 음악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난 누구보다 음악에 자신있어요. 그 다음부터 여러차례 제안이 왔지만 다시는 하지 않았어요.

-따님이 두 분이시죠?

△큰 딸은 UN에서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고 작은 딸은 한국에서 가수로 데뷔했다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작은 딸이 저를 닮아서 노래를 참 잘하는데,우리나라 연예계 풍토를 싫어해서 가수를 그만뒀어요.

-국적이 한국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남편이 이탈리아인이라 그런 소문이 도는 것 같아요. 저는 한번도 한국 국적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저에 대해 잘 모르면서 나온 겁니다. 이것 외에도 저는 한번도 성형수술을 받지 않았는데,너무 젊어 보여서 그런지 4개월에 한번씩 성형수술을 받는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그러면 제가 마이클 잭슨처럼 됐겠죠. 저는 보톡스 한번 맞은 적이 없는걸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지금처럼 노래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제는 손자도 봤고 아이들이나 남편도 잘 지내서 부러운게 없어요. 다만 관객들과 좀더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해요. 지방 소도시에서 공연했을 때 관객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즐겁고 보람있었어요.

-은퇴는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언젠간 하겠죠. 제가 은퇴를 결심하면 마지막 공연을 가진 후에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그동안은 열심히 노래할 생각입니다.

◇패티김 누구인가=한국 가요계의 거목이지만 패티 김은 제대로 음악을 배워본 적이 없다. 음악 교육은 중학교 3학년 때 국악을 잠깐 접한게 전부다. 그러다가 고교 졸업 후 지인의 소개로 얼떨결에 미8군 무대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폭발적인 가창력과 서구적인 외모 때문에 그는 1959년 데뷔 직후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처음엔 팝송만 불렀으나 작곡가 박춘석을 만난 뒤 팝 번안곡에 이어 가요를 부르게 됐다. 트로트와 민요 일색이던 시절 그의 클래식한 노래는 대중음악으로는 드물게 격조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까지 600여곡을 발표했으며 '사랑은 영원히' '서울의 찬가' '이별' '초우' '가을을 남기고 간사랑' '4월이 가면' '사랑은 생명의 꽃' '살짜기 옵서예' '가시나무새' 등 수많은 히트곡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음악인생을 보면 가요계 최초라는 기록이 유독 많다. 그는 1960년 한일 수교가 있기 전,일본 NHK 방송 초청을 받아 국내 최초로 일본에 진출한 한국 연예인이다.

또 1978년 대중가수로는 처음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1985년 서울시향과 팝 콘서트를 열었다. 이어 1989년 한국가수로는 처음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가졌다. 그의 '보물'인 두 딸 가운데 큰딸 정아 씨는 UN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고,작은딸 카밀라는 엄마의 뒤를 잇겠다는 꿈을 가지고 가수로 데뷔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1938년 서울 출생1959년 가수 데뷔1960∼62년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1963∼66년 라스베이거스 등 미국 공연 1967년 TBC TV 패티김쇼 진행1968년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출연1972년 영화 '이별' 주연1974년 재3회 동경 국제가요제에서 3위 입상1989년 미국 뉴욕 카네기홀 공연1999년 데뷔 40주년 기념 전국투어 공연2001년 한국여성단체연합 후원회장 취임2004년 데뷔 45주년 기념 전국투어 공연2005년 골든디스크 공로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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