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남들이 즐거워하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고통을 겪고 있을까."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 비올레타는 3막에서 병으로 죽어가면서 창밖에서 들려오는 사육제의 소란에 이렇게 반응한다.
화려한 사교계 파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막에서 "오로지 인생을 즐기자"고 외치던 비올레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변신이다.
국립오페라단(예술감독 정은숙)의 '라 트라비아타' 연출가 볼프람 메링은 1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공연에서 바로 이런 비올레타의 모습에 주목하며 '사회적 약자의 비극'에 악센트를 주었다.
오케스트라가 1막 전주곡을 연주하는 동안 무대에 펼쳐지는 풍경은 파리의 빈민가. 노숙자들의 무리가 거리 한 모퉁이에서 옹색하게 잠을 자고, 그 무리에 섞여있던 비올레타는 홀연히 그 세계를 빠져나와 무대 반대편 어느 신사의 품에 안긴다.
대본에 쓰여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비올레타의 전사(前史)다.
1막 '축배의 노래'가 펼쳐지는 장면부터 보게 될 때 간과하기 쉬운 비올레타의 출생과 신분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장치인데, 이렇게 해서 3막의 죽음이 갑작스러운 비극적 결말이 아니라 초반부터 극에 내재해 있는 필연적인 귀결임을 보여준다.
굶주리며 거리를 헤매던 빈민계층의 소녀가 상류층의 풍요로운 삶을 꿈꿔보지만 사회적 신분의 벽과 이중윤리에 부딪혀 결국 파멸하고 마는 과정.
비올레타가 거리에서 잠을 자는 장면으로 극을 시작함으로써 이런 과정을 마치 비올레타의 꿈속 이야기처럼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끌고 간 것도 독특한 연출 방식이었다.
전주곡의 파리 빈민 장면과 연결되는 1막의 파티 장면은 무대와 의상, 소품 등 모든 것이 흑백이어서, 세련된 파티 드레스들이 무대를 채웠는데도 뒤에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게 했다.
복잡한 무대 전환 없이 하나의 세트를 전막(全幕)에 사용하는 것은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꽤 오래 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유행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라 트라비아타' 무대로는 새로운 시도.
무대 디자이너 임일진이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라고 해설한 무대 중앙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아래 계단은 상당히 효율적으로 이용되었다.
2막 1장에서 알프레도가 비올레타와의 행복한 삶을 노래할 때 그를 시종 지켜보는 빈민들의 존재 역시 다가올 파국을 암시한다.
연출가 메링은 밝고 화려한 삶과 누추하고 가련한 죽음의 극적인 대비를 택하는 대신, 끊임없는 암시와 불안한 분위기로 관객에게 비올레타의 본질을 바라보게 했다.
3막에서 빈민들이 계단에 베개들을 깔아 비올레타의 침대를 마련하는 연출상의 아이디어는 한동안 교류하던 상류사회에서 비올레타가 철저히 버림 받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비올레타 역의 소프라노 스테파냐 본파델리는 비올레타 역에 꼭 어울리는 음색과 외모로 유럽 각지에서 찬사를 받아왔지만 19일 첫 공연에서 완전히 성공적인 역할을 해내지는 못했다.
원래 큰 음량과 드라마틱한 가창으로 승부하는 가수는 아니지만, 1막에서는 고음이 불안정해 '이상해라E strano'부터 '언제나 자유롭게Sempre libera'에 이르는 고난도의 콜로라투라 부분에서 청중을 압도하기 어려웠다.
2막부터는 좀더 유연한 가창을 들려주었지만 비올레타의 진수를 보여준 것은 3막에 가서였다.
제르몽의 편지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읊조리며 원망하는 탁월한 연기, 죽음을 앞두고 부르는 '이 초상화를 받아요Prendi, quest'e l'immagine' 등의 설득력 있는 가창은 객석을 감동시켰다.
알프레도 역을 맡은 테너 박현재는 지난해 '호프만' 역에 이어 정확하고 안정적인 가창을 들려주었다.
다만 사랑에 빠진 젊은 청년의 열정과 분노를 좀더 자연스러운 연기로 표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비올레타의 사랑을 허락 받은 기쁨, 비올레타를 죽음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처절한 슬픔 등을 그의 가창과 연기에서 충분히 느끼기 어려웠다.
이날 공연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배역은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다. 제르몽 역의 바리톤 유동직은 힘과 정교한 해석력을 함께 지닌 최고의 바리톤이었다. 그는 풍부한 성량을 신중하게 조절하며, 따뜻한 아버지인 동시에 냉혹한 장사꾼인 제르몽의 이중적 성격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국립오페라 합창단은 활력이 넘치는 정확한 가창으로 극 전체에 생동감을 불어넣었고, 카를로 팔레스키가 지휘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는 베르디의 쉼표들을 예민하게 살려 극의 긴장감을 제대로 전달했다.
단조로운 무대가 섬세하고 치밀한 조명의 변화로 장면마다 다른 인상을 지닐 수 있었던 점도 특기할 만하다.
주역들의 연기 호흡이 그리 자연스럽지 않았음은 한 가지 아쉬운 점이다. 본파델리와 박현재는 가장 극적인 순간('사랑해줘요, 알프레도Amami, Alfredo')에서 조차도 진정으로 사랑에 빠져 있는 커플 같은 인상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관객도 3막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연기에 몰입하기 어려웠다.
여전히 어색한 구투(舊套)가 남아있는 '라 트라비아타'의 한국어 대본은 새로운 세대의 관객을 위해 반드시 손질이 필요하다.
공연은 23일까지 계속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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