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연주가에게서 다채로운 경험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동일한 무대에 동일한 프로그램일지언정 그러한 연주가에 한해서는 "아! 그 연주 예전에 들었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매번 같은 작품 안에서도 과거에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그 무엇을 발견해내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구도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그의 성실성 때문이다.
한 작곡가의 시리즈 작품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그의 스타일은 이미 20대부터 시도됐다.
26세에 라벨 피아노 전곡 연주를 시도하면서 그는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그는 두 번째 라벨 전곡 연주회를 시도했다. 이는 젊은 시절의 라벨과 또 다른 차원의 연주로 기록된 바 있다.
최근 백건우의 화두는 베토벤 소나타다. 현재 그 전집 리코딩이 진행중이며, 중기와 초기 소나타집이 완성됐다.
그러나 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에서는 후기 작품에 속하는 27번과 28번이 연주됐다. 후속 앨범에 대한 일종의 예고편이었다.
첫곡으로 연주됐던 모차르트의 론도 K.511에서 감지된 변화는 섬세함이었다. 과거 그 어떤 곡을 연주하건 음색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던 투박한 스타일에서 탈피, 그의 모차르트는 대단히 멜랑콜리하고 반짝이는 색채감을 발산했다.
그리고 이러한 섬세한 다채로움은 다음으로 연주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8번까지 이어졌다.
남성적인 강건함이 손상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백건우의 터치는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서주부의 다성적인 화려함이 풍요롭게 펼쳐졌으며 이처럼 활기찬 분위기는 곡 전체를 관통해 2악장과 4악장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짧은 아다지오가 거의 부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그 역동성은 마지막 다성 푸가에서 충만하게 만개했지만, 베토벤 특유의 견고한 건축미는 탄탄하게 유지되었다.
대부분의 연주를 암보(暗譜)로 소화해내는 백건우가 유일하게 악보를 들고 입장한 곡이 바로 2부 첫곡으로 연주된 슈톡하우젠의 피아노 소품 9번이었다.
가장 낮은 음계에서 가장 높은 음계를 폭넓게 사용한 이 동시대 음악은 악보 각각의 장을 연주가 가 임의대로 순서를 바꾸어 연주할 수 있도록 하여 우연성을 의도한 작품이다.
백건우로서는 메시앙 이후 독일계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으로는 최초의 시도라 할 수 있었는데, 질적 수준을 떠나 피아니스트의 향후 행보를 가늠하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연주였다.
이어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7번은 작품의 본래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28번에 비해 더욱 서정적이고 선율 위주의 스타일이 고수됐다.
힘차고 다이내믹한 서주를 제외한 나머지 진행은 멜로디 라인의 강조로 이루어졌으며, 다이내믹은 느리지 않은 템포와 활기찬 루바토로 유지됐다.
이런 모든 모습들은 과거 베토벤 후기 소나타를 연주할 당시 피아노가 부서질까 염려스러울 만큼 힘으로 몰아붙었던 그의 연주와 대단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리스트 편곡의 바그너 '사랑의 죽음' 또한 아리아의 선율이 부각되는 작품이었다.
바그너의 관현악곡에서 예의 기대하게 되는 풍성한 화성이 뒤편으로 밀린 것이 아쉬웠으나 백건우의 연주는 기교 대신 작품 전체를 견고하게 다듬어가는 방향을 추구했다.
이날 객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꽉 차 백건우에게 거는 기대와 입지를 증명해 보였다.
더불어 연주가가 건반 위에서 손을 내려놓을 때까지 박수를 참으며 정적을 즐기는 모습 또한 관객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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