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新사대주의

“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가지고,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고, 했던 때가 있긴 있었다.

6·25 한국전쟁 때다. 국군은 구경도 못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대는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38선을 넘어선지 3주만에 낙동강변 한 쪽을 남기고는 남쪽 전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세상이 됐다. 국군이 육탄으로 탱크에 뛰어들고, 군부대가 옥쇄를 해가며 막는 분전이 전선 도처에서 잇따랐으나 병력과 장비면에서 당할 수가 없었다.

미국이 전사자만도 3만여 명을 내가며 돕지 않았으면 한반도는 56년전에 벌써 적화통일됐다. 이 때 적화 안 된 것을 시비삼는 이상한 족속이 지금 있기도 하지만, 그땐 ‘미국한테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것’은 사실이다. 다만 “형님 백만 믿겠다”고 한 것도 맞지만 ‘미국 엉덩이 뒤’에 숨진 않았다. 국군은 미군보다 용감히 싸웠다. 국군주력부대가 동부전선이 아닌 서부전선을 맡았더라면 휴전선 철조망이 황해도 해주 이북으로 쳐졌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게 자주 국가의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가 있겠냐?”며 호통친 “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가지고…” 발언이 표현은 거칠어도 일리가 있다고 치자, 한·미동맹 관계를 ‘매달리는 것’으로 본 것은 어폐가 있긴해도 일단은 그렇다고 치자, 문젠 또 다른데 있다.

미국에 대해서는 공연한 적개심을 불태우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무한한 의타심을 인내해 보이는 그의 신사대주의다. 뼛조각 미국산 쇠고기를 못들어오게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중국산 농수산물은 별의별 것이 다 들어온다. 납덩이생선, 물감생선, 중금속미꾸라지 등 온갖 유해물질이 통관된다. 연평도 근해는 한국 영해인데도 중국 어장이 되다시피 했다. 떼거리로 몰려와 조기며 꽃게를 남획해가는 중국선단의 행패에 외교경로를 통해 경고를 촉구했다는 말 한 마디 듣지 못했다.

동북공정의 주체인 중국 사회과학원은 정부 산하 기관이다. 이런데도 정부기관이 아니라며 대응기피로 일관한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영산이다. 한민족의 영산을 국제사회에 중국의 창바이산으로 공식화하려 들어도 입을 다물고만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는 남쪽도 북쪽도 다같이 맞대응한다. 일본의 독도 망언엔 남쪽도 북쪽도 다 같이 분노한다. 북쪽이 ‘미제’라고 하는 미국을 남쪽이 ‘미제’라고 까지는 안 해도, 대통령이란 사람이 “미국 엉덩이… 형님 백”으로 비하했다.

그런데 남과 북이 중국한테는 쪽을 못쓴다. 고구려며 발해 역사를 침탈해가도, 백두산을 빼앗아 가도 남북이 다 구린입 하나 뗄 생각을 않는다. ‘중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중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는 것인지 도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북은 중국 덕에 먹고 산다. 북녘 인민들이 그렇게 말한다. 예컨대 석유도 수요량의 70% 이상을 중국이 공급해준다. 북은 그렇다지만 남쪽은 왜 중국에 쪽을 못 펼까, 북녘 때문이다. 북에 그토록 퍼주고도 직접 대고 뭐 큰소리 치는 게 하나 없다. 중국을 통해 달래고 사정한다. 이러다보니 남북이 다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는 지경이 됐다. 주한중국대사관 직원이 옛 중국사신을 ‘모화관’에 영접했던 일행처럼 방자하게 굴어도 보기만 해야하는 똑같은 세태가 됐다.

북녘이 전쟁을 안 일으킨다는 대통령의 호언에 제시된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중국 정부의 그같은 다짐을 믿는데 그친다. 지난 21일은 참 묘한 날이다. 평통자문회의에서 대통령의 작심 폭언이 있던 그 무렵이다. 13개월만에 열린 6자회담은 아무 성과없이 끝났다. 평양에서는 주먹만한 왕별들을 단 인민군 수뇌부와 주요 지휘관들이 핵보유국에 오른 선군정치 축제에 이어 밤엔 청년남녀학생들의 춤추기 행사가 김일성광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만일 북의 핵무기를 인정하게 되면 남쪽은 설마 동족에겐 쏘지 않겠지하면서도, 언제 저들의 변덕이 또 달라질지 모르는 주눅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도 평화라고 우기는 족속이 있다면 그 저의가 의심된다.

오늘의 한·미동맹을 사대주의라 할 수는 없다. ‘사시나무 떨듯하고’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식의 동맹관계가 아니다. 위태로운 건 나라의 명운을 아무 담보장치 없이 중국에 거는 신사대주의다. 김정일 위원장은 아마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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