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압구정동 한 사무실 구석에 놓인 탁자에 14명의 직원이 빽빽하게 둘러앉았다.
“아오이 유우가 ‘허니와 클로버’ 무대인사 건으로 다음 주에 오는데 언론에 언제 알릴까요?” “‘숏버스’ 등급은 언제 나오나요?” “1월 4일에 나오는데 별 기대는 안합니다. ‘창문을 마주보며’ 등급도 같이 나올 겁니다.” “‘스쿠프’ 프린트는 토요일에 입고될 예정입니다.” “종로에 ‘바벨’ 현수막 걸린 것 보신 분 있어요? 글자 잘 보이던가요?” “민규동 감독님이 ‘열 세 살 수아’ 크랭크인 한 뒤에 현장공개 한 번 하자고 하시네요. 황규덕 감독님의 ‘별빛속으로’ 촬영은 좀 늘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두어 달 죽쒔지만 ‘수면의 과학’이 잘되고 있으니까 그 사이 것은 잊어버리고 내년에도 잘해 봅시다.”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작가주의 영화들을 수입·배급·제작하는 영화사 스폰지의 회의 모습이다. 그런데 회의방식이 좀 특이하다. 30분 남짓 주고받는 대화 속에 십수 편의 영화 제목이 빠르게 지나가더니 끝났다.
조성규(39) 대표가 질문을 하면 각 직원들이 자기 분야에 대해 답하는 형식인데 어느 쪽도 기록하는 것이 별로 없다. “서로 돌아가는 내용을 단계별로 다 꿰고 있는데 새삼 적을 필요가 없다”는 조 대표의 설명.
좋은 작품을 다양하게 흡수하겠다는 뜻을 지닌 스폰지는 지난 한해동안 57편(영화제 형식 상영작 포함)을 배급했다. 그 중 손해를 본 것은 두 세 편에 불과하다. 설립 첫 해인 2002년에 5억원에 그쳤던 매출은 2006년 70억∼80억원으로 올라섰다. “큰 이익은 못냈지만 2007년에도 50여편 배급하고 한국영화 서너 편 제작할 동력을 얻었다”고 밝힌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영화계에서 이렇게 작으나마 확고한 믿음을 주는 스폰지를 2007년 영화계의 기대주로 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작품성에 관심 있는 영화팬이라면 스폰지의 이름이 꽤 낯익을 것이다. ‘조제,호랑이,그리고 물고기들’ ‘메종 드 히미코’ 등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들을 국내에 소개했고,빔 벤더스,기타노 다케시,페드로 알모도바르,짐 자무시 등 감독들의 작품을 꾸준히 들여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에 개봉한 ‘메종 드 히미코’가 9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아 작은 영화로서는 대박을 터트렸다. 지난 7월 시작한 ‘일본 인디 필름 페스티벌’은 80% 이상 좌석 점유율을 자랑하며 10월까지 롱런하는 등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실력있는 국내 감독들의 작품 제작도 참여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종로 시네코아 상영관을 대여해 ‘스폰지하우스 종로’를 열고 ‘스폰지하우스 압구정’까지 마련해 안정적인 배급구조를 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조 대표는 “10년간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한다. 조 대표가 지인들과 함께 스폰지의 전신인 영화사 ‘디지털 네가’를 만든 것은 연세대 신방과 대학원을 졸업한 지 얼마 안된 1997년 9월이었다. 영화 무가지 발행을 함께 했던 이 회사는 2001년까지 ‘화양연화’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수입했고 ,홍콩 감독 프루트 챈을 기용해 장혁 조인성 주연의 ‘화장실,어디에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손해로 2002년 문을 닫아야 했다. 이후 몇몇은 다른 회사로 흩어졌고 조 대표를 비롯한 일부는 2002년 1월에 서브 브랜드 격으로 만들어뒀던 ‘스폰지’로 자리를 옮겼다. 이름은 달라졌으나 ‘작지만 좋은 영화’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던 이들은 2004년부터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지금은 초창기 멤버들까지 거의 컴백한 상태.
대규모 배급사 몇몇이 스크린을 독과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스폰지가 나름의 수익구조를 갖출 수 있었던 원인은 ‘스폰지다운 영화’라는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때문이다. 조 대표는 “스폰지 영화는 머리 아프게 예술만 추구하거나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화를 제외한,좋은 감독의 좋은 영화”라고 소개한다. 이에 공감한 관객들이 스폰지의 이름을 믿고 꾸준히 극장을 찾고 있는 것. 또 2003년부터 운영한 네이버 카페의 힘도 컸다. 이 카페는 일정 기간 들어오지 않으면 강제 탈퇴시키는 규정에도 늘 2만명을 웃도는 회원들이 스폰지 개봉작들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보낸다.
그러나 ‘대박’이라고 해봐야 7만∼8만명 수준이고 1만명도 안드는 영화들이 더 많은 것이 스폰지의 현실. 그런데도 수익을 낼 수 있는 것은 마케팅 비용을 거의 쓰지 않는 동시에 영화들을 워낙 좋은 가격에 일찍 사오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국제영화제를 다니며 미국,유럽,일본 등의 주요 배급사들과 꾸준히 접촉하고 신뢰를 쌓아온 덕에 경쟁력을 가지게 됐다는 것.
또 현재 어떤 감독이 어떤 배우와 어떤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를 모두 꿰고 있어야 적절한 시기에 사올 수 있는데 스폰지가 지난 10년간 쌓아온 노하우는 바로 이런 점이다. 그러다보면 영화를 보기는커녕 제작도 안된 상태에서 구입하는 일도 많지만 배우나 화젯거리보다는 감독을 보고 결정하기 때문에 기대와 다른 작품을 갖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올해도 스폰지는 구스 반 산트,우디 알렌,프랑스와 오종,허우 샤오시엔 등 감독 작품들을 개봉할 예정이고 오다기리 조,기타노 다케시,빔 벤더스 등을 주제로 한 영화제를 기획 중이다. 또 영화진흥위원회가 40억원,스폰지 등이 40억원을 투자해 만든 ‘다양성 펀드’를 통해 한국 영화 제작에 적극 참여할 계획이다.
내후년 쯤에는 케이블 ‘스폰지 채널’을 만드는 것도 새로운 목표. 얼마나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지만 수익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목표는 “계속 좋은 영화를 하는 것”이고 이는 스폰지가 존재하는 한 무난하게 달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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