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서 그는 늘 서민을 대변했다. 사회의 밑바닥 혹은 소외된 자가 그의 '전공'이었다. 그런데 그의 신분이 단번에 수직상승했다. 데뷔 16년 만에 출연한 TV 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에서 그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철한 천재 외과의사 안중근 역을 맡아 흰색 가운에 차가운 안경을 쓰고 전혀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코믹 연기의 달인이기도 한 그가 이번에는 웃지도 않는다. 이 안중근이 지금 안방극장에서 인기 대폭발이다.
"저보고 '버럭 범수', '호통 범수'라고 하대요. 하하."
1일 오전 이번수와 전화통화를 했다. 그는 서울 광진구 화양동 건대병원에서 경기 고양시 탄현 SBS 제작센터로 총알같이 이동하는 차 안이었다. 며칠째 집에 들어가기는커녕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외과의사 봉달희'를 촬영하고 있는 중이다.
"드라마를 처음 해보는데 촬영 스케줄이 정말 장난이 아니네요. 뭐랄까…. 삶으로 부딪히는 스릴이 있다고나 할까요?"
'외과의사 봉달희'는 방송 4회 만인 1월25일 경쟁작인 KBS 2TV '달자의 봄'을 제치고 수목 밤 10시대 시청률 1위로 올라섰다. '그레이 아나토미' 표절 시비는 간데없고 누리꾼들은 극의 재미에 대한 칭찬의 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연기자로서 180도 변신에 성공한 이범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1일 오전 10시 현재 SBS '외과의사 봉달희' 인터넷 게시판은 온통 "안중근 너무 멋있다"는 글로 도배가 돼 있다.
"안중근 역은 정말 해보고 싶었던 캐릭터였어요. 배우로서 코미디든, 액션이든, 휴머니즘이든 조금씩 변화를 주며 간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또한 제대로 변화를 줄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지금 아주 좋습니다. 안중근은 6회까지는 보여주는 게 별로 없습니다. 7~8회부터 안중근이 본격 등장하니 기대해주세요."
의미심장한 발언. 5회가 방송된 지금도 이렇게 난리인데 앞으로를 기대하란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왜 그렇게 안중근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버럭 범수'라는 별명까지 붙여가며.
"병원에서는 촌각을 다투는 다급한 돌발상황들이 많이 발생하는데 안중근이 직선적이고 정확한 캐릭터이다 보니 급한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러면서 응급상황을 잘 해결해나가는 안중근의 모습에 시청자들이 표를 던져주시는 게 아닐까요. 안중근은 어린 시절 아픈 상처 때문에 마음의 문이 닫혀 있는 인물입니다. 믿는 것은 자기밖에 없고 차갑고 독선적인 캐릭터죠. 그런데 앞으로는 봉달희(이요원 분)로 인해 따스함을 알게 되면서 마음을 조금씩 열게 되고 인간적으로 조금 성숙해질 것 같습니다."
이범수는 안중근을 통해 강한 신뢰감을 선사하는 동시에 시청자들의 가슴을 콩닥거리게 할 멜로 연기도 펼치게 된다. 그런데 분위기상 그가 의사로서는 최고지만 사랑에서는 동료 이건욱(김민준 분) 의사에게 패할 것 같다.
"그럴까요?"라며 웃으며 반문한 그는 "작가 선생님이 어떻게 풀어나갈지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안중근은 봉달희로 인해 성숙해지고 봉달희 역시 안중근 덕분에 참된 의사로 성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그는 '의사' 역에 대해 '거룩하다'는 표현을 썼다.
"촬영 초반에는 저라면 의사를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 장기나 들여다보고 피를 만지는 이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하며 살 수 있을까 싶었어요. 짧은 생각이었죠. 그런데 촬영을 거듭하다 보니 이제는 의사가 정말 거룩한 직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어떤 직업이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까. 물론 어떤 직업이든 의미가 있지만 사람 생명을 구하고 연장하는 일을 하는 의사는 정말 거룩합니다. 간혹 뜻이 닿지 않아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노력만으로도 정말 숙연해집니다. 며칠 전에는 다시 태어나면 의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건국대병원, 수원 병점 세트, 탄현 세트 등을 오가며 촬영하는 까닭에 "함께 일하는 제작진과 커피 한잔 나누며 대화할 시간도 없다"는 그는 "이렇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방송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시청자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TV 드라마의 매력인 것 같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전해들으면서 '이런 스릴이 있구나' 느끼고 있다"며 웃었다.
"제가 연기하는 안중근을 시청자들이 사랑해주시는 거잖아요. 제가 연기하는 의사를 말이죠(웃음). 그것은 배우의 특권이면서 연기의 묘미인 것 같아요. '역할놀이'의 즐거움인데 안중근을 연기하며 배우로서 희열을 느끼고 있습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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