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한국인’이라니,

지난 16일 광란의 총성이 세계를 경악시켰다. 미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인 피해 현장은 피와 주검이 무더기로 얼룩졌다. 교수를 포함한 학생 등 32명을 쏴 죽이고 29명이 다친 버지니아공대는 야차가 휩쓴 지옥을 방불케 했다.

쌍권총을 80여발이나 무차별로 쏘아댄 범인이 하필이면 한국인이라니 참담하다. 조승희라는 이름을 가진 스물세살의 이 학교 영문과 학생은 그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자폐증에서 그랬든, 여자 친구 때문에 그랬든, 아니면 다른 뭣 때문에 그랬든 간에 그가 한국인이란 사실이 부끄럽다. 처음 범인이 아시아계로 알려졌을 때만 해도 자괴감이 들더니, 중국인으로 다시 알려졌을 땐 같은 황색 인종으로 수치심이 들었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니 완전 충격이다.

한국인은 원래 이토록 잔인 무도한 것인가, 아니다. 비명에 숨진 희생자와 유족, 그리고 다친 이들에겐 뭐라고 변명할 말도 없지만 한국인은 잔인하지 않다. 눈물도 많고 동정심이 많아 한(恨)을 흥(興)으로 발효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가 한국인이라니 정말 이런 낭패가 없다.

뜻밖의 순간, 청천벽력 같은 경악속에 영문 모르고 죽어간 교수와 학생들의 혼령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너무도 억울해 구천을 맴돌지나 않을까, 또 뭐라고 할 것인지, 위로의 말조차 찾을 길이 없다. 백배사죄할 따름이다. 가정마다 다 소중한 자녀이고 아버지다. 누구도 그것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 열심히 배우고 가르친 그들 또한 행복을 빼앗길 이유가 없다. 이런데도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 비인도적 가해자가 한국인이라니, 같은 한국인으로서 황당하고 송구스럽다.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이 울린 한 방의 총성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쏜 그 역시 젊은 학생이다. 버지니아 주 블랙스버그 시 버지니아공대 참사의 총성 또한 상상할 수 없었던 비극이다. 그러나 한미 관계로 확대될 것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외교 관계로까진 번지지 않아도, 미치는 파장은 클 것이다. 외교는 협상의 길이 있어 타결이 가능하다. 미국 사회에서 내연(內燃)하는 반한인(反韓人) 정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교 문제보다 어쩌면 더 심각하다. 가뜩이나 망연자실해 고개를 못드는 교민들이 ‘어글리 코리안’으로 보는 따가운 미국 사회의 눈총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세계가 지켜본다. 여러 나라 정상이 보내는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다. 이란은 이미 일곱해 동안 미국과 국교가 끊긴 나라다. 이러한 이란의 외교부 대변인은 “어떤 명분을 앞세워도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은 신성과 인간적인 가치에 어긋난다”며 “미국 정부와 희생자 유족들을 위로한다”고 밝혔다. 영국 왕실에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참사 소식에 충격을 받았으며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시한다”는 성명을 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하며 용서와 희망, 화해로 폭력을 꺾을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주시길 하느님께 기도 드린다”는 전문을 보냈다. 호주도, 중국도, 일본 등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청와대도 백악관으로 깊은 위로를 전하는 두 정상 간의 교감이 있긴 있었다. 그래도 뭔가 미흡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미국이 겁나서가 아니다. 비록 한국인의 개인적 소행이지만, 같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인도주의적 부담을 지울 수 없는 순박한 심성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또 한번 생각해 본다. 미국만이 아니다. 지구촌 도처에 한국인이 나가 사는 것은 환영한다. 하지만 분별없는 이민이나 유학은 불행을 싹 틔운다. 버지니아공대 총성의 참변은 상상밖의 극단적인 것이지만, 사려깊지 못한 이민이나 유학으로 가정이 불행해지거나 한국인을 망신시키는 예가 허다하다. 자신이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외국 생활로 모국을 욕되게 하는 무작정 출국은 개인을 위해서도 자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미국은 오는 22일까지를 버지니아공대 희생자의 애도 기간으로 갖는다. 산 사람의 애도가 어찌 혼령을 다 위로한다 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이렇게 밖에 더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산 사람의 예의다. 한국인들 또한 이래서 가슴 저미는 애도의 심정을 같이 갖는다. 억울한 것으로 치자면 어찌 저승길을 쉽게 떠나겠는가, 허나 이미 유명을 달리해 되돌아 올 수 없고 보면 원혼(寃魂)이 되기보단 천국으로 인도되기를 빌고 또 비는 것이다. 희생된 교수 그리고 학생들이여!! 편히 쉬소서, 부디 편히 쉬소서. 부상자들의 쾌유를 빈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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