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자폰의 존재

이샘 보병제25사단 본부대 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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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현재 보병 제25사단 군악대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병사다. 필자가 다루는 악기는 수자폰(Sousaphone)이란 금관악기로 군악대에서 가장 크고 무겁다.

신병교육대에서 소정의 훈련의 받고 자대 배치를 받아 군악대로 전입오게 됐을 때 낯선 악기를 본 필자는 그 크기에 압도돼 저것만은 다루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소망과는 달리 수자폰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이 악기를 주특기로 부여받게 됐다. 날벼락 같은 일이었지만, 국가가 부여한 임무이기에 군말 없이 이 악기와의 전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아 피스라는 입을 대는 쇳덩이에 입술을 갖다 놓고 조심스럽게 불어 보았다. “부아앙. 부아앙”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저음역대의 악기여서 아름다운 선율은 고사하고 어둡고 투박한 소리만 났기에 적잖이 실망했다. 그리고 하나의 곡을 연주하는데 있어서도 고음 악기들에 비해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점이 사실이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니 처음 그 몸체를 보고 실망스러웠던 감정이 한층 깊이를 더하는 것 같았다.

감정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심적 방황을 겪고 있던 필자에게 악기를 교육시켜 주는 파트 선임병이 어느 날 충고어린 한마디를 던져줬다.

“수자폰은 다른 악기들에 비해 주목을 덜 받는 게 사실이지만 수자폰이 없는 음악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야. 전혀 소리의 균형도 맞지 않고 고음 악기들을 뒷받침해 주는 소리가 없어 텅 비는 것 같은 느낌일거야. 음식에 소금이 빠진 것처럼 말이야….”

실제로 수자폰을 빼고 곡을 들어보니 뭔가 허전하고 비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수자폰은 비록 화려한 소리와 멋을 내지는 못하지만 뒤에서 겸손하게 묵묵히 제 소리를 내며 다른 악기들을 뒷받침해 주는 조력자 역할을 하는구나!”

그때부터 수자폰에 대한 태도가 180도 바뀌었고, 그 어떤 악기도 부럽지 않은 자부심이 생기게 됐다. 그리고 현재도 그런 긍정적인 태도로 열심히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수자폰은 앞으로 군복무를 할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먼저 겸손함을 배울 수 있다. 겸손한 마음가짐은 전우들과의 관계 속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자신을 내세우며 과시하지 않고 매사에 겸손함을 품고 군생활을 한다면, 전우들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더불어 따뜻한 온정이 오가는 병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도 배울 수 있다. 수자폰은 한곡을 연주하는데 있어 비록 리드하진 못하지만 묵직한 소리로 곡의 풍성함과 완벽성을 기하는 임무를 책임감 있게 잘 수행해 낸다. 군 생활도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맡겨진 보직과 임무를 책임감을 갖고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보람과 성취감 등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희열들을 통해 군 생황이 재미있어지고 하루하루 만족스럽게 보낼 수 있다.

포용력도 배울 수 있다. 처음엔 피하고 싶은 악기였지만 그 역할을 이해하고 배움으로써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 군 생활도 마찬가지다. 부족한 여건과 환경 속에서 불만을 느끼고 짜증을 낼 수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을 바꾸고 넓고 깊은 마음으로 만족스러워 하며 대한민국 군인이란 자부심을 갖는다면 군 생활이 힘들고 지치더라도 충분히 견디고 즐길 수 있다. 이처럼 수자폰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들은 군 생활에 꼭 필요한 산소와 같은 존재이다.

오늘도 필자는 수자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 연주실로 향한다. 그리고 피스에 입을 대고 조용히 속삭여 본다. “오늘도 한수 부탁한다. 수자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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