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선진국으로 가는 길

이 영 석 국립 한국농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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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일제 36년과 6·25전쟁, 그리고 전후복구 단계의 ‘농산물 부족국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다수성 신품종을 개발하고, 우량종자를 보급하고, 기계화 하는 등의 증산기술 개발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90년대 후반부터는 대부분의 농산물이 모자라서 생기는 문제보다는 남아서 생기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 ‘내수 충족국가’에 이르렀고, 이제는 이렇게 남는 농업생산기반을 ‘수출’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농산물 부족국가’→‘내수 충족국가’→‘농산물 수출국가’→‘농업 선진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우리는 ‘농산물 수출국가’ 단계에 진입해 있다.

그러나 농산물 수출은 인건비 등으로 인한 가격경쟁력에 의해서 좌우되기 때문에, 수출보조와 같은 특별한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카네이션이나 국화, 백합의 절화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네덜란드에서 주로 생산·수출되었지만, 꾸준한 인건비 상승으로 생산기지는 차츰 스페인을 거쳐서 중앙아프리카 국가들로 옮겨갔다. 다만 네덜란드는 신품종을 개발하여 세계 종구(種球)시장을 장악함으로써 여전히 선진국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는 장미나 국화, 백합, 파브리카, 딸기 등의 수출이 늘어나면 날수록 신품종의 종구(種球)나 묘목(苗木), 종자(種子) 등의 수입이 그만큼 늘어나는 보세가공 수출국(保稅加工 輸出國)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화훼류 신품종 종묘(種苗)에 지불하는 로열티가 2005년에만 11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식물에 대한 세계지적재산권기구에 해당되는 국제식물신품종보호연맹(UPOV)의 회원국인 우리나라는 오는 2009년부터 국내의 모든 식물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 1년여가 지나면 농작물 품종의 대외종속은 더 심각해질 것으로 생각되어 걱정이다.

세계화의 진전으로 자본과 상품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선진국들은 새로운 장벽으로 ‘지식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배타적 권리는 인권의 기본인 생존권과 직결된 식량인 농작물의 신품종에도 예외없이 적용되고 있다. 국제식물신품종보호연맹은 그동안 ‘농부의 천부적(天賦的) 권리’로 인정해왔던 자가채종마저도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인정할 수 있다고 규정을 변경함으로써, ‘농부의 천부적 권리’보다는 ‘지식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더 보호하는 쪽으로 바꿨다.

또한 생명공학과 육종기술의 발전으로 ‘의도한 신품종’의 육종 성공가능성이 높아짐으로써, 이미 1980년대 초부터 세계적인 거대기업들은 종자산업을 유망한 미래산업으로 인식하고, 중소규모의 종자업체들을 매수·합병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는 IMF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국내 3대 종묘업체인 흥농, 중앙, 서울 종묘가 세계적인 종자회사인 노바티스, 세미니스, 사카타 등에 각각 인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농산물 생산을 좌우하는 종자를 장악하기 위하여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이미 유전자원 확보, 신품종 육성, 종자의 생산과 보급 등의 종자산업을 국가경쟁력의 새로운 원천(New Source)으로 인식하고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농산물 부족국가’ 때는 증산기술이, 농산물 수출국 단계까지는 생산과 판매기술이 필수적이지만, ‘농업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데는 지식기반의 고부가가치화가 필수적이다. 식물 신품종은 선진국의 기본조건인 ‘지식’을 기반으로 한 고부가가치 농산물이며, 13억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중국의 농산물 증산을 뒷받침하는데도 유용한 상품(商品)이다.

이 영 석 국립 한국농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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