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살아오면서 아! 하면, 어! 하고 받아 줄 친구가 있었는가? 마음을 헤아려 줄 동생이 있었는가? 어려운 인생 숙제를 풀어 줄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오늘 어! 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원 소개를 받고 싶어서였다. 강원도에서 남편과 오붓하게 회를 먹는다고 하였다. 나는 심통섞인 말로 “아이구야 정말 좋겠구나!’ 형부는 어제도 외박하고 들어와 속이 상해 죽겠는데…. 어젯 밤에 이 언니는 밤새 앓았다. 혼자서… 아마 어제 밤에 언니가 아파서 죽었다면, 형부는 웃으면서 새 장가 가겠지?” 라고 했다. 그랬더니 동생은 “언니는 인생에 대해서는 나보다 단수가 한 수 아래야, 난 그런 일에 벌써 졸업했는데 언니는 아직까지도야?” 한다. 그리고는 “ 언~니~ 요즈음 남편들은 함께 살아온 날이 있어 한 사흘은 마음 아파 하다가 새 장가 간데” 하였다. 나는 한 바탕 웃었다.
그 뒷말이 가슴을 따뜻하게 하였다. 동생은 “내일 언니 모시고 병원 갈 테니 준비하라”고 했다. 친 동생은 아니지만 오가는 정을 흠뻑 느끼게 하는 소중한 그녀였다.
남편은 ‘고스톱’을 좋아해서 신혼 초부터 외박을 밥 먹듯이 하였다. 삶에는 교과서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견디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그 외박을 이해하기까진 시간의 강산이 한 두 번 변한 후였다. 이해 한다기 보다 가슴에서 수 없는 천둥 번개가 치고 난 후 포기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를수록 부부가 상대를 포기한다는 것은 피를 말리는 고통을 겪은 후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내가 집 밖을 나간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어쩌다 학교 동아리모임으로 해가 서산에 기우는 것을 모르고 있으면, 벌써 어머니는 나를 찾아 오셨다. 고2 때 친구들과 해수욕장에 놀러 갔다가 막차를 놓친 적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 동구 앞 정류장에 내렸다. 그 자리에 어머니께서 성난 호랑이 모습으로 서 계셨다. 그 후 동아리 모임도 할 수 없을 뿐 더러, 학생들은 밤에 나가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어른이 빨리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래서 하였다. 집에 있는 시간은 대부분을 나는 책을 읽으며 보냈다. 어른들 몰래 이불 속에서 만화책도 읽었다.
결혼하면 정말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만 알았다. 부부는 누구나 낭만적인 비둘기처럼 살아가는 줄만 알았다. 결혼은 운명이나 행복에 대한 책임은 서로의 공동 책임인줄만 알았다. 특히 남편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해 줘야하고 지켜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남편은 나를 지켜주기 보다는 깊은 밤 무서움에 떨게 하였다. 부부는 경제적인 문제부터 하찮은 생활 문제까지 절대 헛된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다. 그 소설 같은 생각, 그 꿈 같은 생각은 남편의 외박으로 산산이 깨어지기 시작하였다.
외박하고 들어와 설친 잠을 자는 남편을 보면서 요즈음은 얄미운 생각보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왜일까? 정말 전생에 남편한테 무슨 죄를 많이 지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 때문에 그를 위해 인내하며 살아가는 희생정신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부모유산도 없이 맨 주먹으로 한 가정을 일으켜 세운 남편이다. 그 추운 겨울날씨에 125㏄ 오토바이 한대에 온갖 물건을 사다 나르기도 했다. 돈 한 푼 없는 시련을 당하면서도 이 만큼 농장을 만든 노고 때문에 나는 외박도 너그럽게 봐 주며 살고 있다.
남편한테 맛있는 사랑을 많이 먹고 체할 것이 아니라, 그이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퍼 주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 움직인다. 몇 년 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시절엔 왜 그렇게 마음을 끓이며 아파하고 살았을까. 이제는 모든 일들을 승화시키며 내 자신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 자신이 있는데…. 외박까지 하며 남편이 즐겼던 고스톱은 그 사람의 놀이문화이며 그것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던 외박으로 분노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던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내 마음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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