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절약정신이 대단했다. 물과 전기를 아끼기 위해 항상 손빨래를 했고 한번 쓴 비눗물은 다시 모아 걸레를 빠는데 썼다. 특히 며느리에게도 매일 가계부를 쓰게 했고 보름마다 이를 검사했다.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는 일본 유학파 출신의 재원이지만 내각제 하의 대통령인 남편의 위상을 고려해 자신의 역할을 최소화했다. 두 자녀와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그는 청와대 안주인의 삶을 ‘조롱(새장) 안의 새’로 비유했다. 지인들에게 “내 인생에서 가장 유감으로 생각하는 일이 청와대에서의 생활이었다”고 털어놨을 정도다.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는 구설수에 자주 올랐다. 41세에 대통령 부인이 된 그는 취임식 때 손을 흔들며 남편과 같이 식장에 들어섰다 호된 비판에 시달렸다. 대통령 몇 발자국 뒤에서 내조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 모습에 익숙했던 국민이 정서적 반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여성지와의 인터뷰에 명품시계를 차고 나와 ‘명품족’으로 낙인찍혔고 해외 순방 때 고급의상을 싹쓸이한다는 소문 때문에 투서도 받았다. 본인도 이를 의식해 공식행사 때마다 어떤 옷을 입고 나갈지 고민했으며 행사가 끝나면 비디오를 돌려보며 자신의 모습을 분석했다. 노태우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는 재임 중 단 한건의 인터뷰도 하지 않으면서 ‘그림자 내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고, 기독교 신자인 손명순 여사(김영삼 대통령 부인)는 1987년 대선 때 남편의 일요일 선거 유세를 막아 마찰을 빚었다.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이희호 여사(김대중 대통령 부인)는 퇴임 후에도 활발히 활동하는 최초의 대통령 부인이다.
육영수 여사는 1961년 5월 15일 늦은 밤 치밀하게 쿠데타를 준비해왔던 박정희 소장이 거사를 위해 집을 나서려는 순간 “근혜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세요.”하며 남편의 소매를 붙잡았다. 쿠데타에 실패하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식들의 얼굴을 한번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자는 아이들 얼굴을 한참 들여다 본 박 소장이 집을 나가자 육 여사는 남편과 교환했던 편지를 하나씩 불태웠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주변을 정리했다. 박정희·육영수 부부의 큰딸 박근혜 의원이 아버지처럼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다. 운명의 경선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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