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논술>
-독 서 토 론 讀 書 討 論-
▲독서는 논술의 시작. 그렇다고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죠? 논술 외길 10년, 유레카 노하우를 담은 독서 커리큘럼과 토론식 콘텐츠가 여러분을 알찬 논술의 세계로 이끌어요. 친구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면 금상첨화겠네요.
<벙어리들> 논술로 읽기 : 벙어리 두의 입을 굳게 다물게 만든 진짜 정체는? 벙어리들>
“남은 오후 시간은 몹시 지루했다. 이바르는 그저 피곤하고 가슴이 무척 답답했다. 무언가 얘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무룩한 그들의 얼굴에는 일종의 오기같은 것만 보일 뿐이었다.”
20일의 파업이 무위로 돌아가고,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왔다. 하지만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넓은 작업장은 망치 소리와 기계톱 소리가 윙윙 채울 뿐이다.
주인공 이바르도 최고참 발레스테르도, 조합대표인 마르쿠도 저마다 할말을 가슴속에 묻어버린 벙어리들이다. 그오후에 공장주 라살의 아이가 갑자기 위독해졌다는 소식이 작업장에 날아든다. 일꾼들은 걱정을 하면서도, 어깨가 축 처진 채 ‘잘들 가쇼’ 하고 인사하는 라살에게 끝내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한다. 그들을 벙어리로 만든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김지나(상임연구원)
▲벙어리들 <작 품 해 설>작>
부조리 앞에서 벙어리가된 사람들
사람들 사이에 침묵의 강이 흐른다.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강은 직공과 주인이라는 관계 때문일까? 참으로 무엇이라 말하기 힘든 저마다의 현실, 그 부조리한 현실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벙어리로 사는 것 아닐까?
‘어느 토요일 저녁, 학원 수업을 마치고 헐레벌떡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나는 갑자기 입을 여는 것조차 쉽지 않은 기분이었다. 지쳐 보이는 어머니는 등을 보인 채 덤덤하게 설거지를 하고 계셨고,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물끄러미 TV 뉴스를 보고 계시는데, 그 뉴스가 귀에 들어오는지 알 수 없다. 동생의 방문은 언제나처럼 닫혀 있다.’
이 건조해 보이는 어느 가족의 일상은 사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자주 접하는 모습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무미건조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입을 여는 순간, 오히려 더 격렬한 갈등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학원에서 돌아온 ‘나’가 동생의 방문을 열자, 동생은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며 화를 벌컥 낸다. 동생의 화에 기분이 상한 나는, 어머니에게 배고파 죽겠다며 밥을 빨리 달라고 화풀이를 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내가 이 집의 식모냐, 학원에 갔다왔으면 인사부터 할 일이지 왜 신경질이냐고 볼멘소리를 하고, 그 소리에 거실에 계신 아버지가 어머니를 향해 한마디 한다. ‘공부하다 온 아이에게 빨리 밥을 줄 일이지 화를 낼 건 뭐냐고.’ 아버지의 말은 도화선이 되어 두 사람의 격렬한 싸움을 촉발한다.
뭐, 이 정도는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시나리오로 상황이 전개되는 경우가 꽤 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고 나면 가족들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리하여 침묵의 장막이 가족과 가족 사이에 길게 드리워지는 것이다. 침묵은 최소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 가슴속에 그늘져 있는 상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이 침묵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여러분들은 어떤가? 하고 싶은 말은 태산인데 정작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아 답답했던 경험은 없었나? 그때를 잠시 회상해보고 왜, 무엇 때문에 입을 열 수 없었는지 말해보자.
물론 위의 경우는 카뮈의 단편소설 <벙어리들> 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벙어리들>
주인공 이바르와 최고 고참 일꾼 발레스테르를 비롯해 에스포지토, 마르쿠, 소년 발르리 등은 제통소에서 통을 만들고 수선하는 작업을 하는 직공들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이 일하는 제통업은 망해가는 판국이었고, 따라서 사업주들은 어떻게든 급료를 낮춰 수지를 맞추려 할 뿐이었다.
하루하루 체념하며 살아가던 그들은 어느 날 참다못해 주인과 담판을 벌이지만, 주인 라살은 거두절미하고 ‘싫으면 나가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이 일로 열대여섯 명의 직공은 파업을 강행하지만, 파업은 고작 20일 만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철회된다. 사람들은 다시 제통소로 돌아가 일을 하게 되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들 벙어리가 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던 것이다.
언뜻 실패한 파업 때문으로 보이는 그들의 침묵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그들에게 일터는 어떤 의미일까? 그저 통을 만드는 기술일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소중한 것이었는데, 첫 담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떠날 테면 떠나라고 말한 주인 라살에게 그들은 심한 배반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도 라살의 아이가 다쳤을 때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워했고, 그러면서도 라살에게 위로의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 침묵의 강이 흐른다.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강은 직공과 주인이라는 관계 때문일까? 참으로 무엇이라 말하기 힘든 저마다의 현실, 그 부조리한 현실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벙어리로 사는 것 아닐까?
▲ 40대 노동자, 이바르
주인공 이바르는 제통소(통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40대 노동자로, 다리가 불편하다. 제통업이 사양산업이 되어가고 있지만, 자신의 기술을 버리고 전업할 꿈도 꾸지 못한다. “전업하는 그 자체야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지식, 손에 익은 기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그에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바르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 구구절절 우리 사회의 40, 50대 가장들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바르가 직면한 직업적 위기 상황마저도 지금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가 겪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이바르의 제통소는 기술 진보로 더 이상 통을 만드는 일이 줄어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처럼 IT 기술의 진보는 수많은 직업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던가. 사회환경이 변하고, 사람들은 모두 변해야 산다고 으름장을 놓지만 몇십 년 동안 해온 일을 두고, 새 일을 찾으라는 것은 가혹한 요구일 수 있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 놓인 이바르지만 “스무 살 때 그는 바다를 아무리 보아도 싫증”을 내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다는 그에게 언제나 즐거운 해변에서의 주말을 약속해” 주었고, “절름발이이면서도, 아니, 절름발이여서” 수영을 무척 좋아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는 “시가지 한쪽 끝 제통 공장으로 가는 동안 통 바다를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제통 공장’이 이바르의 현실이라면, ‘바다’는 이바르에게는 청춘이며, 꿈이며, 열정이었다.
우리들의 아버지가 그렇듯, 이바르는 결혼하고 아들을 낳자, 먹고 살기 위해 부업으로 토요일엔 제통 공장으로, 일요일엔 또 어딘가로 일을 하러 다녔고, 더 이상 깊고 맑은 물, 강렬한 태양, 여인들의 육체로 대표되는 이 고장의 행복을 만끽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일상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통 메우기 기술은 오랜 숙련이 필요한 어려운 기술이었는데, 이바르가 바로 그런 숙련된 통장이였고, 그것은 그의 자랑이었다. 이바르는 일터에서 돌아와서 집 테라스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해가 기운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유를 즐기는, 그런 가장인 것이다.
하지만 파업으로 시작된 상황은 그의 입에 굳게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다시 일하게 되었다는 말에 아내 페르낭드는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주인이 올려주기로 했군요!” 그러나 파업은 실패하지 않았던가. 이바르는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동료에게도, 사정을 뻔히 아는 공장주 라살과 발레스테르에게도 마음속 진심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바르가 왜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는지 전후 상황을 고려하여 그 이유를 찾아 말해보자.
▲ 벙어리가 된 사람들
주인공 이바르는 위기 상황에서도 조용히 체념하며 가족과 일상에 대한 소소한 사랑으로 행복을 채워가는 소시민이다. 이바르 외에 다른 동료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그 외에도 피부가 검붉은 털보 에스포지토, 테너 가수 같은 머리를 한 조합 대표 마르쿠, 공장의 유일한 아랍인 사이드, 감독 발레스테르, 소년 발르리 등이 있다.
최고참 발레스테르가 파업을 마치고 일터로 돌아온 사람들을 위해 공장문을 열어준다. 하지만 그 역시 입을 굳게 닫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에서 금방 찾아볼 수 있다.
“직공들 중 가장 연장자인 발레스테르는 애초에 파업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에스포지토에게서 주인의 배나 불려주는 사람이란 말을 들은 뒤로 줄곧 아무 말도 않고 있는 터였다.”
에스포지토의 말처럼 주인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서 주인에게 아첨하느라 파업을 반대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는, 후자 쪽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업계 전체가 기울고 있고, 주인 라살 역시 악하고 영악한 인물은 아니지 않는가. 이바르가 라살에 대해 품은 감정 역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발레스테르는 중간 관리자들이 일반 노동자들에게 가장 일반적으로 듣는 악담을 들었고, 그리하여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발레스테르는 어쩌면 직공들의 입장도, 라살의 입장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을 거고, 누구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니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러분이 발레스테르라면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었겠는가?
조업을 멈춘 작업장은 을씨년스러웠다. 발레스테르의 지휘로 일을 시작하자 비로소 “공장 안에는 다시 하나의 열기가, 하나의 생명이 차츰 움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노동으로 다시 생기를 되찾은 작업장.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기술로, 무엇인가 사람에게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것. 노동이 가진 이러한 가치를 직공들은 누구보다도 더 명확히 알고 있었다.
얼마 후 작업장에 들어선 라살은 발르리에게, 마르쿠에게 말을 건넸지만 직공들은 묵묵부답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넓은 공장 안을 가득 채운 것은 망치 소리와 기계톱 소리뿐이었다.
▲ 왜 그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나?
다시 돌아온 작업장에서 이바르는 아랍 노동자 사이드와 점심을 나누어 먹는다. 그의 점심은 달랑 치즈만 들어 있는 샌드위치였다. 그가 좋아하는 스페인 식 오믈렛이나, 기름을 둘러 구운 비프스테이크도 들어 있지 않았다. 사이드는 아예 마른 빵조차 싸올 형편이 못되어 점심 시간에 나무 부스러기들 속에 벌렁 드러누워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직공들의 처지는 이랬다.
“체념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체념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입을 닫고 산다…. 말 한마디 않고 똑같은 길을 매일 아침, 점점 숨 가빠지는 길을 가서는, 주말이면 언제나 남는 것 없는 돈을 그저 주는 대로 받아 온다…. 못할 노릇이다.”
결국 직공들은 체념조차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 주인과 담판을 하러 나선 것이다. 물론 그들도 알고 있다. 라살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그들의 제통업이 점점 기울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임금을 올려달라고 면담을 요청한 것인데, 라살은 그런 그들을 향해 매몰차게 말한다. 싫으면 아예 나가버리라고.
직공들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주인 라살에 대한 깊은 배반감이 하나일 것이다. 자신들의 사정을 몰라주고 어렵게 말문을 연 면담에서 그렇게 모진 말을 하다니. ‘싫으면 나가라’는 말은 직공들의 입을 채운 자물쇠였다.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가지고, 그 일을 함으로써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직공들에게 일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그들에게 이 한마디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돌아온 작업장에 라살이 나타나 직공들에게 인사를 건네도 그들은 그 인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경기가 회복되면 요구하지 않아도 들어줄 테니 합심해서 일하자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라살은 어떤가. 라살 역시 큰 배반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함께 잔뼈가 굵으며 일해온 처지인데, 경기가 좋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건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는 직공들이 야속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홧김에 싫으면 나가라고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고참 일꾼 에스포지토에게도, 직공들에게도, 이바르에게도, 라살에게도 모두 그 나름대로의 고민과 고충이 있는데, 그들 모두는 각각의 입장과 처지를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 것이다. 라살은 아무리 직공들과 허물없이 생활해왔다고는 해도 한번도 직공들의 집을 가본 일이 없으니 그들의 삶을 제대로 알 턱이 없고, 직공들 역시 주인 라살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이 부조리함이 만들어낸 상황이 그들 모두를 침묵하게 만든 것 아닐까.
그러고 있는데, 사장의 아이가 쓰러졌고, 구급차가 왔다. 위독하다는 소식도 들렸다. 직공들은 속으로 걱정을 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자코 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퇴근을 하기 위해 몸을 씻을 때, 라살은 어색하게 “잘들 가쇼.” 하고 인사를 건넨다. 이바르는 막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문은 이미 닫혀버리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이바르는 그 모든 잘못이 사장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젊었다면 바다 저 너머로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무엇이 그들의 입을 굳게 닫게 만들었나?
순하고 정직한 직공 이바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황혼이 달려오고 있는 바다를 향해 선 채 이렇게 말한다.
“아아, 라살이 잘못한 거야!”
이 작품을 노동자와 고용주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노동소설로 읽기는 무리다. 아들이 쓰러져 위독한 상태에 빠진 라살의 딱한 처지와 그 와중에도 직공들에게 위로조차 받지 못한 상황이 안됐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라살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해도, 또 직공들과 함께 일하면서 잔뼈가 굵었다고 해도 직공들과 같은 처지는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구조적인 문제이다.
직공들은 어떤가? 그들은 가난한 중에도 도시락을 나눠 먹고, 아이가 위험에 빠지자 라살에 대해 동정하는 마음을 가진, 선량한 사람들이다. 임금 인상 요구를 거절한 라살이나, 파업을 한 직공들이나 모두 승자도, 패자도 아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모든 침묵의 책임이 라살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이 작품에 나타난 직공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도대체 모두의 입을 굳게 막은 진짜 정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60대 이바르를 비롯한 직공들의 처지와 우리 아버지들의 처지는 분명 판이하게 다르다. 지금의 가장들은 그보다는 훨씬 좋은 조건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닥친 본질적인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집안에서 입을 굳게 닫고 있는 아버지의 침묵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의 침묵, 동생의 침묵만큼 아버지의 침묵에도 틀림없이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운 어떤 이유가 숨어 있지 않을까?
▲벙어리들
<토론해봅시다>토론해봅시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왜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게 되었을까요? 이 모든 침묵의 책임이 라살에게 있다고 생각하는지, 만일 아니라면 무엇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자신의 생각을 밝히세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1913~1960)
프랑스의 작가, 극작가, 평론가. 프랑스령인 알제리 몽드비 출생. 아버지는 알사스 출신의 농업 노동자였고, 스페인계 어머니는 청각장애를 가진 문맹(文盲)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아버지가 참전하여 전사하자, 그는 어머니를 따라 알제리의 빈민가 벨쿠르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수년간 그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겪게 된다. 동물적인 침묵에 가까울 정도로 말수가 적은 어머니가 가정부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아이들의 교육과 집안일은 환상적이며 독단적인 데다가 거칠고 극성스러운 할머니가 맡아서 하게 된다. 극히 대조적인 두 여인의 모습은 그의 작가로서의 성장에 큰 영향을 마치게 된다. 카뮈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매일같이 무리하게 일을 했고, 끼니조차 거르기 일쑤였다. 결국 1930년 폐결핵에 걸리면서 죽음과 대면하게 된다. 이처럼 인생의 첫 관문에서 겪게 된 빈곤, 비참,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체험은 그의 인생과 작가로서의 사상에 밑바탕이 된다.
그의 작품 세계는 흔히 ‘부조리의 문학’이라고 일컫는다. 그는 인생의 근원적인 무의미에 대한 반항을 역설적으로 그려내는 한편,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했으며, 간결한 문체로 부조리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이방인> <최초의 인간> <페스트> <정의의 사람들> <시지프의 신화> <전락> <반항적인 인간> 등이 있다. 반항적인> 전락> 시지프의> 정의의> 페스트> 최초의>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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