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한반도의 심장으로 지나 통일로· 세계로 이어지리니

김종길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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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도의 경계를 걷다

소설가 이문구는 1977년 주거지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행정리, 흔히 발안이라 불리는 쇠면부락으로 옮겨 ‘우리동네’ 연작을 집필했었다. 표준어의 문법을 버리고 지역어로 채색한 그의 소설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불과 30년이 지난 지금 행정리는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없다.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농사꾼은 호적 파갖구 물 근너온 의붓국민인감. 다른 물건은 죄다 맹그는 늠이 기분대루 값을 매기는디 워째서 농사꾼만 남이 긋어준 금에 밑돌아야 혀? 마눌 한 접이 금가면 버리는 푸라스틱 바가지만두 못허니 이래두 갱기찮은 겨? 드런 늠덜. 암만 초식 장사 제 손끝에 먹구 산다지만 해도 너무헌다구. 꼭 이래야 발전헌다는 겨?”- ‘우리 동네 姜氏’ 중에서

국도라 명명되기 전, 이 길은 수백 수천 년 동안 남방과 북방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였다. 바다와 대륙의 간접지로서 한반도는 문명이 한데로 모여 통섭하고 창조되는 장(場)일뿐만 아니라 다시 신문명의 연기적 상상을 위한 유목지로 작동했다. 대지의 지배욕구가 국가경계의 아웃라인을 결정했던 그 시대에도 이 길은 경계 너머의 먼 꿈을 실체화하는 수레였으며 발자국이었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현실은 단지 그것이 남북의 평화연대를 상징하는 것만이 아닌 길의 복권이라는 문명사적 의미도 내장돼 있다 할 것이다. 남북의 이데올로기 차이가 반세기 이상 남한을 섬처럼 고립시킨 현실에서 이 ‘걷기’의 정치적이며 문화적인 의미는 매우 크지 않을 수 없다.

‘경기, 1번국도’를 위한 답사팀의 첫 번째 행동도 ‘걷기’로 시작됐다. 안성천의 남과 북이 충청도와 경기도이고 그 사이에 안성천교가 있다. 일행은 다리의 남쪽 끝에서 국도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물이 가로지르는 경계는 경계가 아닌 삶을 지속하는 생태이며, 그 현장이었다. 간간히 비가 흩날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천렵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경계는 그 안에서 꽃을 피운다”는 명언을 떠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이 국도가 그리 행복하거나 문명의 교류통로로 읽히기 힘든 상황을 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근대화는 ‘도시화’와 곧장 맞물린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시대령 위에는 시간의 속도를 최대의 인위로 끌어 올려 ‘고속성장’의 신화를 만들어 낸 기념탑이 서 있다. 그 기념탑을 위한 수몰지구의 역사는 고스란히 저항이었으며, 투쟁이었다. 성장의 신화가 이제 명품도시의 신화로 탈바꿈해 땅의 피륙을 벗겨내고 있는 국도의 풍경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또한, 동북아시아 패권의 주도권을 견제하는 험프리캠프의 미군기지 풍경도 아픈 현실임에 분명했다. 평택 대추리를 향해 내 달리며 지난 몇년 동안 생태적 공동체로서 전형적인 ‘두레마을’의 역량을 보여준 마을 사람들을 떠 올렸다. 이제 그들은 이곳에 없었다.

유토피아는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현실 어디에도 없기에 이상향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향을 꿈꾼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현실에 없는 그곳을 왜 그토록 꿈을 꾸는 가이다. 아마도 그들은 길을 잃은 것이 분명하다. 국도의 경계와 풍경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길의 상실’과 일그러진 꿈의 실체들이었다.

/김종길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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