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재연 將帥旗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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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연(魚在淵) 장군(1823·순조 23~ 1871·고종)은 이천(利川) 출신이다. 1841년 무과에 급제,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됐다. 1866년 프랑스 로즈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했을 때(병인양요·丙寅洋擾)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확보함과 동시에 장시(場市)를 개설하는 등 변경무역을 활성화했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다. 6월1일 손돌목 포격사건이 발생,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발발했다.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된 어재연 장군은 광성보(鑛城堡)로 급파돼 6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10일 미군은 강화도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草芝鎭)을 점거한 데 이어 다음날 덕진진(德津鎭)을 함락하고 광성보공략에 나섰다. 어재연 장군은 광성보에 ‘사(師)’자가 큼직하게 적힌 ‘수자기(師字旗·어재연 장수기)’를 게양하고 침공해 오는 미군과 격전을 벌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작전을 개시, 함포와 야포사격으로 초토화작전을 펼쳤다.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을 맞아 어재연군은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다. 어 장군은 임전무퇴의 결의로 미군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개를 양손에 쥐고 미군에 던지며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화력을 앞세워 광성진을 함락시킨 미군은 장수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내걸었다. 당시 미군은 ‘어재연 장수기’를 전리품으로 빼앗아 갔는데 그 ‘장수의 깃발’이 136년 만에 돌아왔다. 하지만 아주 돌아온 건 아니다.

문화재청이 역사적 비극이 서려 있는 장군기의 영구반환을 추진했으나 관련법 개정과 미국 의회 통과 없이 반환이 힘들다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와 협의한 끝에 2년 계약(최장 10년까지 계약 연장 가능)의 장기 대여 방식으로 지난 19일 들여왔다. 가로 415㎝, 세로 435㎝의 장수기는 삼베로 만들었는데 미군이 승전을 기념해 오른쪽 일부를 잘라냈다. 미국은 남의 나라에서 약탈해간 장수기 하나도 이렇게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개발이란 미명하에 문화재를 훼손하고 방치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일본 등으로 유출된 문화재가 얼마나 되는 지 제대로 파악이나 했는 지도 의심이 든다. 어재연 장수기는 완전히 반환돼야 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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