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生者)의 오만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누구도 이 대자연의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알 수가 없다. 생(生)과 사(死)의 경계는 어떤 것일까, 혼백이 몸을 떠나는 유체이탈의 순간은 어떤 것일까 아무도 모른다. 산자는 경험하지 못하고, 죽은 이는 되돌아 올 수 없기 때문이다.

혼백이 떠난 몸은 썩는다. 그럼, 몸을 떠난 혼백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니면 유체이탈이 아니고, 혼백도 몸과 함께 유체공멸하는 것일까 아무도 모른다. 산자는 경험하지 못하고 죽은 이는 되돌아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저승은 초인적 세계의 실상일 수 있고, 이승 사람의 가상일 수도 있다. 몸은 죽어도 혼백은 더 살고싶어 하는 것이 우리들 산자의 염원이다. 천국과 지옥, 기왕이면 천국을 바라지만 죽어서도 살긴 사는 게 지옥인 것이 이승이 여기는 저승의 관념인 것이다.

그러나 산자의 입장에선 어떻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죽은 사람의 형체는 영원히 볼 수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죽음은 영원한 소멸, 영원한 침묵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기약이 없다. 나이는 다만 확률일 뿐이다. 성별이나 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이 허망한 인간의 죽음이다.

죽음(死)으로 인한 주검(屍)이 경외로운 것은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인간적 가치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죽음에 빈부귀천이 없는 보편성과 마찬가지로, 주검의 경외로움 또한 빈부귀천을 초월한다. 누구도 주검 앞에서 오만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은 곧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인 것이다.

주검을 치르는 모든 장례는 이래서 존엄하다. 옛날에 빚을 내서라도 치른 꽃상여에 만장이 줄이은 출상을 현대인이 낭비로 보는 것은 현대 생활상으로 본 시각이다. 빚을 내서라도 그래야 했던 건 주검에 대한 인간 가치의 존엄성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러고 싶어도 넘치는 차들로 길이 막혀 못하지만 출상의 존엄성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출상은 북망산으로 가 매장되기도 하고, 장례예식장으로 가 화장되기도 한다. 매장은 물리적 변화이고 화장은 화학적 변화다.

새삼 수치를 장황하게 들 것도 없다. 화장이 매장을 앞지르기 시작한 근래의 증가율은 긍정적 사회현상이다. 국토의 묘지화를 걱정한다. 또 개발에 밀려 이미 써놓은 묘도 이장하여 화장을 하는 실정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마땅한 묏자리 또한 드물다.

그런데 저승길 가기가 힘들다. 화장률 증가의 긍정적 사회현상 한편으로 이를 해치는 부정적 사회현상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장례예식장이 턱없이 모자란다. 새로 시설하려고 해도 시설하려는 지역마다 일부의 반대꾼들이 들고 일어난다. 몇 십년 전처럼 연기 내뿜고, 냄새 피우고, 외관상 흉한 그런 화장장이 아니다. 동네 인근에 세우는 것도 아니다. 공원화하는 장례예식장인 데도 기를 쓰고 막는다. 관념이 아닌 인식의 차이다.

수목장림은 새 장묘문화다. 아름드리 거목 밑에 화장한 주검의 유골을 묻는 것이다. 주검의 물리적 변화나 화학적 변화나 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긴 하다. 그런 가운데 새 장묘문화로 갖는 수목장림은 또 다른 자연회귀의 의미를 갖는다. 거목은 자연의 묘비인 것이다.

도유림 대여섯 군데에 추진하는 수목장림 시범사업은 경기도가 하는 일 가운데 몇 안 되는 괜찮은 사업 중 하나다. 한데, 이 또한 곳곳마다 주민 반대에 부딪혀 어려운 모양이다. 수질오염을 든다고 한다. 오염되고 말 것도 없지만, 말하기로 하면 묘를 쓰는 것 보단 비할 수 없이 낫다. 지역 이미지가 훼손된다고 한다. 생각하기에 달렸다. 역시 관념이 아닌 인식의 차이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본다. 나의 주검이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남의 주검에도 존엄성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엔 결국 나의 주검도 포함되는 것이다. 수목장림은 누구든 자신의 유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남의 장례식에서 슬퍼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신을 확인한 종말의 자기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어떤 불행속에도 살아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생자필멸의 법칙에서 죽는 것이 바쁜 것일 순 없다. 생사의 경계를 한 번 넘어서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이래서 산자는 죽은이보다 행복하고, 죽은이는 혼백이 어떻든 산자보다 불행하다면, 언젠간 그 길로 갈 우리가 장례시설을 혐오시만 하는 건 산자의 오만인 것이다. 관념은 정적(靜的)인 정서이고, 인식은 동적(動的)인 판단이다. 장례예식장이나 수목장림에 좀 더 겸손한 생각을 가져야 할 시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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