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실크로드, 오래된 어제〈14〉 사마르칸트, 눈부신 푸른 돔 /사마르칸트 ①
내용 있는 역사는 폐허도 아름답다. 사마르칸트! 그 어떤 수식어도 미치지 못할 찬란한 보석 같은 도시. 푸른 눈물 같은 돔의 역사를 찾아온 나그네에게, 흥망성쇠의 역정에 회한하는 영웅들의 자취는 어떻게 다가올까?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청한 아무르 티무르가 만든 이 빛나는 도시에 진입하면서, 나는 맞선을 보러 가는 청년처럼 설렜다. 그러나 폭발할 것 같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한 불가피한 제동일까? 버스는 새로 만들어진 큰 길에 들어서면서 타이어가 주저앉아 굼벵이처럼 간신히 움직였고 진입 할 때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유적지들은 설렘의 허기를 가중시켰다.
여장을 푼 곳은 구시가지에서 반대편에 위치한 투마리스호텔이었는데 천일야화 속에서나 상상할 수 있을 법하게 아주 기형적이고 우스꽝스러웠다. 대상들의 숙소처럼 중앙에 마당이 있고 사방으로 방들이 있었으며 1층의 어떤 방은 넓은 거실에 커다란 풀장이 있어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2층에 있는 나의 방 또한 해괴했다. 문을 열면 거실이 나오고 뒤편에 두개의 방이 나뉘어져 있는데 오른쪽 방은 일반 객실보다 조금 큰 정도였지만 야시시한 커튼이 드리워진 중앙의 큰 방은 침대며 이부자리 등이 영락없는 공주의 방이었다. 이런 커다란 핑크빛 방에서 여자라면 몰라도 남자 혼자 잠을 자기란 매우 느끼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앞 길 건너편에는 기다란 테라스가 있는 노천식당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샤슬릭은 물론 쇠고기 꼬치, 닭고기 꼬치 등도 진한 냄새를 풍겼으며 맥주와 보드카를 마시는 젊은이들로 북적댔다. 한쪽에 주저앉아 술 한잔 마셔보지만 무언가 뭉클해 오는 사마르칸트의 묵은 모랫바람은 불지 않았고 취하지도, 채워지지도 않았다. 자리를 옮겨 호텔 옆에 붙은 레스토랑으로 갔다. 담배를 꼬나문 한무리 젊은이들이 땀 젖은 몸을 드러낸 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모락모락 담배 연기 피어오르는 그들 뒤엔 늘씬한 여인이 피아노 앞에 앉아 몸을 흐느적이며 흘러간 팝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렉산더가 사마르칸트를 칠 때 잡혀온 박트리아 족장의 딸 록사네처럼 앙칼져 보였지만, 검은 드레스 사이로 드러나는 갈색 피부는 섹시함을 더해줬고 이 분위기의 와인 한잔은 나그네 여수를 달콤하게 녹여줬다. 술은 불량한 기억을 잠재우는 마취제요, 침체된 기분에 흥을 불어넣는 흥분제이며 꽉 막힌 통로로부터 나를 탈출시켜주는 비상구이다.
환전하려고 은행을 찾았으나 달러가 없어 1시간 반을 줄을 서 기다렸다. 1달러에 1천200숨. 50달러를 바꿨는데 제법 부피가 컸다. 모두 수작업으로 세어줬는데 한 할머니가 환전한 돈을 세더니 모자란다고 계속 항의해 더욱 더뎌졌다. 돈을 바꿨으니 사마르칸트 내부로 들어가 먼 곳으로부터 호텔 가까운 쪽으로 훑어 나올 계획을 세웠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1천200숨의 몸값을 받아내는 울르그르벡 천문대였다. 언덕 위에 위치한 이 천문대는 티무르의 손자이며 사마르칸트의 르네상스를 만든 위대한 학자이자 왕이었던 울르그르벡이 건립했다. 헤로인 같은 하얀 햇살이 잔혹했던 티무르처럼 살기를 품고 작열했다.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에 원형으로 지어진 박물관이 있고 오른쪽에 그 시대의 천문 관측기가 전시되고 있는데 과거엔 높이가 40m되는 거대한 천문대였다고 한다. 천문대는 지하로 평행의 레일이 설치된 매우 특이한 형태였다.
이곳을 나와 한참을 내려가면 다리가 나오고 그 다리 끝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다니엘의 묘지가 나왔다. 다니엘은 구약성서 다니엘서의 주인공으로 구약시대 4대 예언자중 마지막 인물이며 유대민족이 처음 바빌론에 잡혀갔을 때 함께 잡혀갔다. 이후 궁정에서 시동으로 일했으나 조국의 복권을 기원하며 이교의 권력과 박해에 대항해 싸웠다. 그는 느부갓네 살왕의 꿈을 해몽해준 일로 명예로운 지위에 오르기도 했으나 고관들의 질시로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무사했으며, ‘믿음의 용사, 신의 절대적인 가호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곳은 1천200숨을 내야 입장할 수 있지만 달랑 다니엘의 묘라는 관하나가 전부였다. 관은 다니엘의 정강이뼈가 들어있다고 하는데 뼈가 자라 이처럼 긴 관에 넣어졌다니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그 속이 무척 궁금했다. 믿음의 용사라는 다니엘의 묘는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곳곳에 있다고 하니, 모순에 대한 시비보다도 그 상징성을 생각해야 하리라.
그곳에서 나와 곧 바로 언덕으로 올라가면 넓은 구릉지가 나온다. 이곳이 옛 사마르칸트의 중심지로 황금기를 구가했던 아프라시압이다. 제라프샨(옛 옥수스 강의 지류) 강가에서 이 도시를 바라보며 알렉산더 대왕은 이렇게 말했다. “사마르칸트에 관한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구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걸 빼 놓고 말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짓밟고 간 이 도시는 6세기 초 몽골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됐으며 이외에도 유목민들과 페르시아, 투르크족, 훈족 등이 차례로 유린했고 지금의 아프라시압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황무지로 변해 나그네 발걸음에 뽀얀 흙먼지만 일으켰다. 타는 갈증을 견디며 터벅터벅 반대편 언덕을 내려갈 때, 이 황폐한 곳에 도시가 있었다는 걸 증명해줄 산 물증인 아프라시압 역사박물관이 나타났다. 입장료가 두려워 뒤란으로 담치기를 했으나 허사였다. 이곳은 정문이 아닌 건물 안에서 티켓을 팔았기 때문이다. 줄 돈 다 주고 씩씩거리며 한바퀴 도는데 정복도 입지 않은 여직원 한명이 카메라를 사용하려면 별도로 돈을 내라고 따라다녀 더욱 화가 났다.
전시물은 소비에트 고고학자들이 폐허 속에 묻힌 유물들을 수집해 놓은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유적지에서 뜯어내 퍼즐 조각처럼 다시 결합한 벽화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이것이 그 유명한 소그디아나 예술의 정수라는 ‘사신행렬도’였다. 이웃 국가들이 사마르칸트에 화친을 목적으로 보낸 사신들의 모습은 서사시 처럼 현란하게 벽 위에 펼쳐졌고 머리를 땋은 고려 사신들의 모습도 등장했으나 기대와 달리 너무 낡아 아쉽게도 그 아름다움을 체득하기 어려웠다. 밖으로 나오자 이글거리는 빛이 독 오른 살모사 혀처럼 날름거리고 있었다. 멀리 푸른 돔이 보이는 작은 나무 그늘 아래 지친 몸을 내려놓고, 점심대용으로 싸온 삶은 계란을 꺼내 유일한 가족인 나를 먹인다. 산다는 건 바람 같다. 영웅도 호걸도 그들의 역사를 안고 바람처럼 지나갔다. 인생은 순간에 지나고, 순간은 잠시 머물렀던 짧은 바람 같은 것이다. 바람에게 전하는 M의 편지에 이런 시 한편을 실어 보낸다.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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