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오달제 - 충의와 절개의 상징 삼학사

김명우 경기도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사진=조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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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꺾지못한 忠節… 일제강점기때 애국심 북돋워

반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치욕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아마도 20세기 초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그들에게 35년 동안 지배를 받은 일이라는 데 동의하리라 믿는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이 아닐까 한다. 한 나라의 임금이 맨땅에 엎드려 ‘오랑캐’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 예를 올렸으니 무심한 산천도 슬퍼할 일이 아니겠는가. 1636년(인조 14) 1월로부터 어언 380여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당시의 치욕은 남한산성과 한강나루(삼전도), 삼학사(三學士)의 묘소 등지에 그대로 남아있다.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여 청나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한 홍익한(洪翼漢·1586~1637)·윤집(尹集·1606~1637)·오달제(吳達濟·1609~1637)를 말한다. 삼학사라는 이름은 1674년 송시열이 이들의 전기인 ‘삼학사전’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송시열은 국난을 맞아 의리를 지키며 죽는 방식에는 자결(自決)·전사(戰死)·절사(節死)가 있는데, 이 중 포로로 잡혀 절사하는 것이 가장 귀한 죽음이라며 삼학사의 순절을 칭송하였다. 그 뒤 이들에게는 모두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남한산성 안에 현절사를 지어 그들의 뜻을 기리게 하는 등 삼학사는 충의와 절개의 상징으로 추앙되었다. 삼학사 중 당시 29세의 젊은 혈기로 의리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오달제 선생과 만나보자.

삼전도의 치욕, 그리고 오달제

오달제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계휘(季輝)이며, 호는 추담(秋潭)이다. 아버지 오윤해(吳允諧)와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 중 달(達)은 돌림자이고, 제(濟)는 ‘항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으며, 한 시대를 구제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었다.

그는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했으며 26세에는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전적·시강원사서·정언·지평 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1636년에는 홍문관 수찬을 거쳐 부교리가 됐다.

이 무렵 중국의 정세를 보면 여진족이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후금(後金)을 세우고, 임진왜란으로 국력을 쇠진한 명나라와 조선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발흥하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정세에 주시하면서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펴나갔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후금과의 관계를 끊고 명을 후원하는 이른바 친명배금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후금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그리하여 후금이 1627년 1월 조선을 침략, 2개월간의 전쟁을 치르고 두 나라 간에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되었으니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이후 후금은 더욱 강성해져 누르하치의 아들 황태극(皇太極, 태종)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조선에 대해 종래 형제관계를 넘어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요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청나라를 치자고 주장하는 대신들을 압송하라는 통첩을 보내왔다. 조선이 이를 묵살하자 청 태종은 1636년 12월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청 군대는 조선의 맹장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피해 심양을 떠난 지 13일 만에 평양을 지나고, 다음 날 개성까지 내려왔다. 이에 인조는 부랴부랴 종묘사직에 안치되어 있던 신주를 모시고, 왕자와 세자빈, 세손 등을 강화도로 피신시켰다. 인조 자신도 밤을 틈 타 강화도로 가려 했으나 이미 청나라 군대에 의해 길이 막히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앞서 오달제는 1636년 10월 청과의 화친을 목적으로 사신을 교환하기로 한 최명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고 벼슬에서 물러나게 됐다. 최명길은 종묘사직에 공이 있는 조정의 중신인데, ‘젖비린내 나는 어린 사람’이 함부로 멸시하고 모욕한다는 게 파직의 이유였다. 그리하여 2개월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을 때 오달제는 일반백성의 신분으로 걸어서 산성으로 들어가 임금을 호위했다.

청나라 군대는 산성을 에워싸고 위협해 왔다. 성 안의 식량은 점점 떨어져갔고, 지방에서 산성으로 진군하던 관군은 힘없이 패퇴하였다. 게다가 청 태종은 강화도를 함락하여 왕자 등을 포로로 잡았음을 통보하며, 항복할 것은 물론 척화를 주장한 인사들을 결박해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에 오달제는 윤집과 함께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섰고,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행함으로써 병자호란의 막은 내리게 되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청나라로 끌려 온 오달제의 절개를 꺾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에 와 살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며 끝내 오랑캐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오달제는 홍익한·윤집과 함께 참혹하게 살해된 뒤 이국 땅에 버려졌다. 이때 세자를 호위하기 위해 심양에 와 있던 정뇌경이 통역관을 시켜 이들의 시신을 거두고자 했으나 끝내 청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홍익한과 윤집의 경우 그의 의관을 가지고 일찍이 장례를 지냈지만 오달제는 오랫동안 유택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오달제의 허리띠와 주머니를 간직하고 있던 남씨부인이 혼을 불러 장례지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며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남씨부인이 죽고 난 뒤 비로소 허리띠와 주머니로 오달제의 예장을 지내게 되었다. 현재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해주오씨 선산에 자리한 오달제 선생 묘역에는 그의 부인 고령신씨·의령남씨의 묘가 나란히 있고, 그 가운데 뒤쪽으로 오달제의 무덤이 있다. 두 부인의 묘를 조성한 뒤에 오달제의 허장(虛葬)을 치렀기 때문에 고령신씨 옆으로 묘역을 마련하기에는 지형상 공간이 허락하지 않아 뒤편에 유택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828년에 손자 오경원이 오달제의 대낭장비(帶囊藏碑), 즉 띠[帶]와 주머니[囊]를 묻은 사연을 기록한 비석을 건립하였다. 이때 비문은 김상헌의 후손인 김조순에게 부탁해 지었는데,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청국과 화친을 맺기 위한 국서를 찢어버리는 등 척화를 주장했던 인물이라 특별히 그 후손에게 청한 것이라고 한다. 오달제 대낭장비는 오달제와 그의 부인 묘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다.

오달제의 묘소에서 남동쪽으로 고려 말의 충신이며 대학자인 정몽주의 묘역이 바라다 보인다. 마치 두 충신의 넋이 2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충절을 얘기하고 있는 듯하여 사뭇 숙연해진다. 아직 겨울바람이 차지만 병자·정축년의 그것만큼 앙칼지지는 못하리라.

오달제 혹은 삼학사의 정신

일제강점기인 193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한 사건이 신문지상에 보도됐다. 그해 5월 중국 봉천에서 삼한산두(三韓山斗)라고 새겨진 비석이 발견된 것이다. 삼한은 조선을 말함이요, 산두는 태산과 북두칠성처럼 빛나는 인물이라는 뜻으로 이 비가 삼학사비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석의 이수 부분만 찾아냈을 뿐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혔던 관계로 비신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봉천에 살고 있던 삼학사의 후손과 교포들은 삼학사유적보존회를 발족하고 모금운동을 전개, 새로운 삼학사비, 즉 증수삼학사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청나라에서 삼학사의 곧은 절개를 기려 본받게 하고자 심양에 그들의 사당을 짓고 비를 세웠는데, 세월이 지나 없어진 것을 다시 세운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원래 삼학사비의 존재나 청나라에서 삼학사의 절개를 기리고자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웠는지의 사실은 확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사건은 조작 여부를 떠나 당시 나라를 빼앗긴 마당에 과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와 의리를 위했던 삼학사의 정신을 일깨움으로써 일본과 싸워 조국의 광복을 찾자는 우리 민족의 기개를 보여주었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우리 민족에게 항일의식을 앙양시키고 애국심을 북돋기 위해 삼학사에 주목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삼학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말할 것도 없이 충절이다. 그런데 삼학사 정신이 한때 식민사학의 논리에서는 현실적이지 못한 이상주의로, 또는 사대주의적 신념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삼학사는 ‘의리에 집착하여 나라를 그르치게 한 허황된 명분론자’로 전락하였고, 그들의 행적은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고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척화를 주장함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시대였다. 성리학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지고지순한 가치를 두며 의리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임금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은 당시 하늘의 도리이자 학자가 가질 수 있는 양심이고 삶의 존재방식이었다. 따라서 생명보다 의리를 우선시하는 것을 절대불변의 법칙으로 여기던 때였다. 후세의 잣대로 당시를 평가하여 삼학사를 한낱 이상주의적 명분론자로 평해서는 안 될 일이다.

끝으로 식민사학의 논리에 반문해 본다. 오늘날 삼학사가 저들 말대로 백성의 고통을 뒤로한 채 승산 없는 전쟁을 부르짖은 반역사적 인물로 평가되는가, 아니면 국가의 존엄을 지키고자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고 살신성인의 길을 택한 충신으로 추앙되고 있는가를.

/김명우 경기도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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