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祖 御眞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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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용어로는 어진(御眞) 외에도 진용(眞容)·진(眞)·진영(眞影)·수용(?容)·성용(聖容)·영자(影子)·영정(影幀)·어용(御容)·왕상(王像)·어영(御影) 등 다양하다. 1713년(숙종 39) 숙종 어진을 그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였던 이이명의 건의에 따라 ‘어진’이라는 명칭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어진 제작은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수용을 바라보면서 그린 도사(圖寫), 왕의 생존시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 그린 추사(追寫),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됐거나 혹은 새로운 진전에 봉안하게 될 경우 기존본을 범본(範本)으로 하여 신본을 그린 모사(模寫) 등 3 종류다. 추사가 그 핍진(逼眞)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조선의 왕 가운데 사진이 함께 전하는 고종과 순종을 제외하고 어진이 전해지는 경우는 태조 이성계, 영조(반신상·연잉군 시절), 철종 등 3명의 4점에 불과하다. 태조의 어진은 전주, 함흥, 평양, 경주, 서울 등 8곳에 25~26점이 보관됐었지만 전주 경기전의 1점과 함흥 준원전의 사진만 남아 있다. 서울에서 원래 자리인 전주로 다시 돌아가는 태조 어진은 1410년 처음 그려진 것이 낡자 1872년 모사로 그렸다.

조선 왕들의 어진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다수가 사라졌고, 6·25 전쟁 때 나머지가 불탔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어진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를 함께 가져갔으나 갑작스런 화재로 어진 대부분을 잃었다고 한다. 영조의 연잉군 시절 어진과 철종의 어진 일부가 불 탄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 22대 정조대왕 어진은 수원 화성행궁 옆 화령전에 봉안됐다가 6·25 때 정부가 서울로 가져갔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그러나 1989년 수원시가 우당(友堂) 이길범(李吉範) 화백에게 의뢰하여 그려진 어진이 수원효행기념관에 봉안돼 있다. 정조대왕의 동상(銅像) 제작은 이 어진을 참고했다. 이길범 화백은 1992년에도 정조 어진 2점을 완성했는데 구군복(具軍服) 차림의 어진은 화령전에, 곤룡포를 입은 어진은 화성홍보관에 각각 보존돼 있다. 이 어진은 12월 완공 예정인 화성박물관에 봉안된다. 이길범 화백의 화필로 부활, 영생하는 정조의 어진은 문무를 겸한 성군상(聖君像)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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