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칸문화

조선시대에 길손이 머물 잠자리는 ‘술막’ ‘숫막’이라고도 했던 주막집이다. 술은 막걸리, 밥은 순대국밥을 으레 팔았지만, 해가 저문 길손이 하룻밤 자고가는 숙박시설이 되기도 했다. 역(驛)이나 원(院)이 있었으나 벼슬아치들의 공무 여행에 이용되는 곳이다 보니, 민초들은 교통의 요지마다 자리 잡았던 주막을 드는 게 고작이었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어사또가 되어 남원 길을 가는 대목에 수원(지금은 화성) 병점, 떡전골목의 주막 얘기가 나온다.

여관(旅館)이 생긴 것은 일제 강점기다. ‘여관’은 한문의 일본식 발음 ‘료칸’을 우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토방마루를 둔 자그만 한 방(객실)이 ㅡ자나 ㄱ자 모양으로 나열된 여관은 아침 저녁 식사를 제공했다. 주막의 중노미와 같은 ‘조바’가 방마다 들어다 받치는 밥상은 찬이 열댓가지에 이른다. 아침 저녁이면 우물가에 모여 세수를 하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여관의 이런 풍습이 사라진 것은 1950년대 후반이다.

얼마전 일본의 료칸 사절들이 세계를 돌며 전통 료칸을 홍보하는 길에 서울에 왔다. ‘오카미’로 불리우는 일본 료칸의 여주인들이다. 손님이 오면 90도 인사로 맞이하는 것을 시작으로 손님의 요구마다 무릎을 꿇어 경청하고, 아침 저녁 식사를 정성껏 마련해 넣어주고, 다다미방 이부자리를 펴고 개는가 하면 떠날 땐 90도 인사로 작별하는 종업원의 갖가지 서비스가 손님이 머무는 동안 한시도 소홀히 함이 없는 것이 료칸이다.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 때의 여관은 료칸의 약식 변형이었던 것이다. 여관은 이제 하급 숙박시설이 된 가운데 모텔이며 호텔이 산간벽지까지 즐비하다. 전국이 1일 생활권이여서 자야할 길손이 전 같지 않을 터인데 숙박시설은 늘었다.

일본의 료칸문화가 눈여겨 보아지는 것은 가업으로 고부간에 물려주고 이어받을 만큼 자긍심을 갖는다는 점이다. 호텔 등에 밀려 손님이 줄어 해외 홍보활동에 나선 지경이지만, 그들은 손님이 아무리 줄어도 료칸을 지키는 것은 자신들의 운명이라고 들 말한다.

가업을 중요시하고 전통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그들의 장인정신은 배울만 하다. 여담으로 옛 주막을 재현하는 업소가 있으면 장사가 될법한 생각이든다.

/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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