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간

대장간이 사라진 것은 1970년대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접어든 시기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세계가 수공업에서 기계공업으로 바뀌었으나, 한국은 1970년대 이전까지는 농경사회 위주였으므로 수공업이 기계공업과 공존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한국 역시 기계공업 위주의 산업사회가 되면서 대장간이 자취를 감추었다. 대장간에서 손으로 낫 한 자루 만드는 데 한 시간이 소요되는 데 비해 기계로 한 시간이면 무더기로 제품이 쏟아지기 때문인 것이다.

인류가 청동기시대 들어 철제의 주요 산업을 담당했던 대장간과 대장장이는 이렇게 해서 사라졌다. 대장간은 유철장(놋쇠) 주철장(주물) 수철장(시우쇠) 등이 있었는 데 민중과 가장 밀접했던 것은 농기구 등을 만들어낸 수철장 대장간이다.

풀무로 불을 피운 화로에 쇠를 빨갛게 달궈 모루(강철로 만든 바탕틀)위에 올려놓고 메질이나 망치질을 하여 찬물에 담금질해가며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작업은 대장장이 혼자서도 하고 조수와 둘이서도 하는 데 메질이나 망치질하는 경쾌한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타 화음을 이룬다.

시골 장터에 대장간이 반드시 있었던 것은 그만큼 농경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닷새 만에 서는 장날이면 장꾼들이 다른 덴 안 가도 대장간과 국밥 포장집은 거의가 찾는 필수코스였던 것이다.

경기일보 3일자 26면 ‘경기으뜸이’로 보도된 안성 대장간 신인영(57)씨 기사는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대장장이의 명맥을 잇는 이가 있구나 싶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그러고 보니 고급 제품은 기계제품이 아닌 수공업 제품이다. 양복이나 구두도 기계로 만든 것 보다 손으로 만드는 맞춤이 더 비싼 것은 수품 등이 훨씬 우수하기 때문이다. 품질로 보아서는 기계가 사람의 손을 따라잡지 못한다.

신인영씨는 대장간 일을 평생 해 왔다. 그의 외길 인생은 이미 장인의 경지다. 인간문화재 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장간 일이 번성하기를 기대하면서, 기왕이면 그에 그치지 않는 후계자를 길렀으면 한다. 앞으로는 전문가 시대고, 대장장이는 희귀업종의 전문가인 것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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