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형벌은 응보형주의로 시작됐다. 그리고 근대사회까지 이어졌다. 예컨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였다. 이런 원초적 고대사회의 응보형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름이 없다. (사람을 죽인 것도 살인, 상해치사, 과실치사 등의 구분이 있는데도 이 같은 개념의 구분이 고대엔 동서양 다 같이 없었다)
한비자(韓非子)가 명실상부한 형 집행의 엄정성을 설파한 형명(刑名) 사상 또한 응보형주의다. 소크라테스가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다 신을 모독했다는 죄로 든 독배도 응보형주의다. 중세기의 종교재판도, 조선왕조의 법전 ‘경국대전’도 응보형주의가 근간이다.
현대사회의 형벌은 목적형주의다. 보복적 응보형이 아닌 교화적 목적형인 것이다. ‘형무소’라던 명칭을 ‘교도소’로 바꾼 게 이 때문이다. 흔히 교도소 감방에서 수인끼리 범죄를 배운다지만, 반대로 교화시책이 주효하여 신앙을 갖거나 기술을 익히거나 각종 검정고시에 붙어 만학의 길을 걷는 등 목적형주의의 성공 사례가 적지않다.
그러나 사형은 목적형주의가 아닌 응보형주의의 형벌이다. 교화가 불가능한 흉악범을 사회와 영원히 격리하는 형벌이 사형이다. (외환 내란 등 국사범도 이에 포함된다) “실정법으로 인명을 빼앗는 사형은 자연법에 위배되는 살인”이라는 것이 사형 폐지론자들의 말이다.
종신형제를 두어 사회와 격리하는 방법도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형을 12년째 집행하지 않는 동안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사형수가 19명이나 된다. 이들 중엔 유기징역으로 또 감형돼 결국은 석방되는 사형수도 없잖을 것이다.
사형과 무기는 하늘과 땅 차이다. 사형 집행을 않는 동안 살인범 증가율이 38%에 이른다. 사형제는 사회방어를 위한 장치다. 그리고 확정된 사형수는 형의 집행으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워야 된다.
부녀자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범행을 계기로 미집행 사형수 문제가 논란이 됐다. 수감 중인 사형수가 58명이다. 강호순은 부녀자 연쇄살인을 취미삼아 했다. 목적형주의의 형사정책에도, 유일하게 잔존하는 응보형주의의 사형제 형벌이 이런 인간들 때문에 필요하다. 자기네 가족이 그 같은 피해를 입어도 ‘살려야 된다’고 말 할 것인지, 사형 폐지론자들에게 묻는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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