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DNA 은행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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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시절 17대 국회에서 ‘유전자감식정보수집법안’이 상정됐을 때 인권단체 등이 강력히 반발했다. 법안은 흐지부지됐다. 그런데 지난해 3월 법무부가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유전자 수집에 관한 법률을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법안이 재등장한 배경은 ‘안양 초등생 살인사건’이었다. 이때 성폭력·살인·강도·방화 등 11개 중범죄자들의 유전자를 수집해 활용하는 법안이 마련됐다. ‘유전자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안’으로 법안의 명칭을 바꾸면서 인권보호 장치를 명문화했다.

경찰은 구속 피의자 중 본인의 ‘동의’를 얻어, 검찰은 형이 확정된 수령자로부터는 ‘강제로’ 유전자(DNA)를 수집·관리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입법안은 아직 국회에 제출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DNA는 지문과 달리 개인 정보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수집 범위가 늘어날 경우 국가가 국민을 감시하는 체계가 갖춰질 수 있다”는 인권침해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31일 영국 서튼 콜드필드, 17세 여학생이 연말 파티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살해됐다. 여학생 몸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액이 발견됐다. 경찰은 DNA를 검출해 보관했다. 2003년 41세의 콜린 웨이트란 남성이 도심에서 난동을 피운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그의 DNA를 추출한 결과 7년 전 여학생의 몸에서 발견된 유전자와 일치했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영국은 2000년부터 5년간 약 600억원의 예산을 들여 범죄자의 DNA를 관리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모든 범죄자의 유전자가 관리 대상이다. 행패를 부린 사람의 체포가 7년 전 여학생 살인 사건의 해결로 이어진 실화다. ‘시간이 흘러도 범인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방법이 DNA 수사’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7명을 성폭행한 뒤 살해한 강호순도 경찰이 DNA 물증을 통해 자백을 받아냈다. 지난해 11월4일 화성시 송산면 우음도 고속도로 공사현장 갈대밭에서 백골상태로 발견된 곽모 여인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범인도 DNA 분석을 통해 검거했다. 살인·강도·강간·유괴·아동성폭행 등 ‘흉악범 유전자 은행’을 우리나라도 도입해야 된다. 세계 70여 개국은 이미 범죄자 DNA 관리 시스템을 갖췄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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