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는 소통의 생활이다. 소통은 곧 생각의 교류와 마음의 교감이다. 소통이 잘 돼야 인간지사 만사가 매끄럽다. 소통에는 상대가 있다. 즉 타인과의 소통인 것이다.
그런데 소통은 꼭 타인과 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신과의 소통도 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자신과의 소통이다. 자신을 반성해보는 것은 훌륭한 자신과의 대화인 것이다.
한데, 자신과의 소통도 심적 소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영육(靈肉), 즉 영혼과 육체를 지녔다. ‘영육일치’는 영혼과 육체는 차별이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불가분의 하나로 보는 사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풍미했다가 중세기 기독교에서 부인된 후 문예부흥기에 부활했다.
근데, ‘영육일치’를 인정하든 부정하든 인간은 영육을 지닌 존재인 건 틀림이 없다. 자신의 맘을 돌아보는 것이 영적 소통이라면, 자신의 몸을돌아보는 것은 육적 소통이다. 영적 소통은 이해할 수 있어도 육적 소통은 아마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심령학은 영적 주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런 심령학에서 육신의 생명력을 인정하는 것은 육신을 영적 주체의 외연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오장육부(간장·심장·비장·폐장·신장, 담·위·대장·소장·삼초·방광)는 각기 독립된 생명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오장육부만이 아니고 머리며 눈·코·귀·팔·다리도 매 한가지다.
이러므로 아픈데가 있으면 아픈 부분을 쓰다듬으며, 예컨대 “그래, 그동안 너에게 너무 무심했어. 날 위해 고생 많이 했는데 널 몰라봤구나”하고 위로해주면 혹사 당했던 아픈 부위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속상한 일이 생겨서 마음이 아프면 눈을 감은채 두손을 가슴에 대고 “널 아프게해서 미안해!”하고 한참 위로하면 자신이 위로를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육적 소통은 제 몸을 스스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으로, 이기심과는 구별되는 자애심(自愛心·self love)이다. 윤리학에서는 이를 ‘자기보존’이라고 한다. 인간사에 타인과의 소통이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과의 소통 또한 소홀히 해선 안되고, 자신과의 소통은 영적인 심성 소통과 함께 육적 소통도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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