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4월11일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참전 중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을 전격 해임했다. 인천 상륙작전과 태평양 공격 등으로 미군과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낸 최고의 장군을 해임한 것은 폭발적인 사건이었다. 트루먼의 조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LA에선 ‘맥아더 장군의 정치적 암살에 대한 묵념’ 시간이 주어졌다.
트루먼은 1945년 4월 루스벨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인기를 따라가지 못했다. 반면 맥아더는 당시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947년 트루먼은 맥아더와 국내 정치 현실에 관해 의견을 나눌 생각으로 귀국을 제안했으나 맥아더는 특별한 이유 없이 거절했다.
1950년 10월 10만여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맥아더는 압록강 다리를 폭파할 것을 요청했으나 트루먼은 중국을 너무 자극할 것을 두려워해 허가하지 않았다. 12월 유엔군은 전면적인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 2월 트루먼은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을 협상으로 끝내는 방안을 모색했다. 맥아더는 이를 항복이나 마찬가지라며 격분했다.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M 닉슨, 대통령 자리를 향한 두 사람의 대결은 미국의 현대사를 바꾸었다. 케네디가 전형적인 바람둥이 기질이었다면, 닉슨은 공부벌레 스타일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가 승리했지만 그는 저격 당했고, 닉슨은 이후 대통령의 꿈을 이뤘지만 불명예를 안고 퇴진해야 했다. 당시 선거에서 처음 도입된 TV토론은 다른 나라에도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는 서사적 영웅의 시대를 살았다. 그들은 왕이자 전사였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무력외교를 배경으로 한 그들의 관계는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적대적 상황이었다. 둘은 4년에 걸쳐 세 번의 전투를 일으켰으며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후 서구문명의 중흥을 이끈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했다.
만일 트루먼과 맥아더가 원만한 관계였다면 한국전쟁의 양상과 우리 현대사는 지금과는 다른 흐름으로 진행됐을지 모른다.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다면 암살 당하지 않았을 터이다. 지도자들의 라이벌 의식은 역사와 운명을 갈라놓는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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