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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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金弘集·1842~1896)은 26세인 1867년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나섰다. 1880년 수신사가 돼 일본으로 간 그는 서구문물을 일찍 받아 들여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워 돌아왔고,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과 깊이 사귀어 그의 논문인 ‘사의조선책략’을 받아왔다. “조선이 독립을 유지하려면 청나라와 친하고, 일본과는 평화를 지키고, 미국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조선이 일본과 청나라에만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홍집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만들고, 지석영으로 하여금 종두법을 널리 퍼뜨리도록 했으며, 일본의 발달된 문물을 배우기 위해 신사유람단도 만들어 보냈다. 또한 미국, 영국,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도 조약을 맺었다. 그는 이렇게 해야만 조선이 많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는 일본으로부터 군사, 재정 문제를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우정국 개설 피로연에서 정변을 일으켰으나 일본은 개화파와의 약속을 저버렸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이른바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김홍집은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한 공로로 좌의정이 되었으나 청·일의 압박에 밀려 불리한 조약을 체결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그뒤 10년동안 한직에서 조용히 지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10년 뒤 조선은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맞았다. 일본 주도하에 갑오개혁을 선포하고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군국기무처’를 만들었고 다시 돌아온 영의정 김홍집이 그 책임을 맡게 됐다. 500년 넘게 이어오던 의정부와 6조를 없애고 총리대신 한 사람이 모든 일을 감독하고 책임지게 하였다. 이로써 김홍집은 우리 역사상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총리대신이 됐다.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은 빠르게 변해갔다. 양반 중심 사회에서 모든 백성이 주인인 나라로 탈바꿈했다. 누구나 교육 받고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이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가 꿈꾸던 새나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을 다스리기 쉬운 나라로 만들기 위해 강요한 것이다. 나라에 힘이 없으면 국익도 없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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