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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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해병대는 1949년 4월15일 380명으로 창설됐다. 현재는 2만6천여명이다. 현재 연평도(연평부대), 백령도(6여단), 포항(1사단), 김포(2사단)에 주둔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해병대는 ‘전략도서 확보작전(1951~1953)’을 통해 서해 5도(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를 점령했다.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1951년 함경남도 원산 앞바다 여도에 상륙했다. 영흥만 일대 신도 등 7개 도서지역을 점령하기도 했다. 함경북도 명천 부근의 양도와 평안남도의 석도, 초도에도 상륙했다.

1953년 휴전협정이 됐다. 북한과 중공군은 38도선을 경계로 각자의 영토를 원상복귀시키고자 했고 한국과 유엔군은 현재의 실 점령지를 기준으로 주장했다. 결국 ‘전략상의 이유’로 해병대가 북한 측 영해 깊숙이 위치한 여도와 양도 등에서 철수하면서 현재의 서해 5개 도서만 아군 통제 하에 두게 됐다. 해병대가 백령도, 연평도에 주둔하는 이유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탈환한 해병대는 북진했다. 한반도 통일을 위해 고성과 운산, 함흥까지 진격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4 후퇴를 하게 됐다. 그해 2월 한미 연합군의 서울 재수복작전이 전개됐다. 1951년 3월부터 ‘김포지구 작전’을 통해 김포 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해병대는 1953년 휴전 시까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의 수도 서울 침공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지금 김포, 강화에 해병 2사단이 주둔하게 된 동기다.

1951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은 “수도 서울을 지킬 수 있도록 ‘가장 강한 부대’인 한미 해병대를 장단(사천강)지구로 배치해 달라”고 벤 플리트 미8군 사령관에게 요구했다.

당시 강원도 양구군 도솔산 지구에 있던 해병본진 1개 연대가 1952년 3월 파주 장단지구로 옮겨졌고 이듬해 휴전이 되면서 해병대는 1959년까지 파주지역에 머물렀다.

‘귀신 잡는 해병’은 용맹과 전우애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국가전략 기동부대의 일원으로서 선봉군임을 자랑한다”는 ‘해병의 긍지’ 첫 마디다. 전역한 이후의 ‘해병전우회’ 봉사 활동도 대단하다. 해병대 병력을 감축하려는 계획은 당치 않다. 백지화해야 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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