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병사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38선 일원에서 남침이 시작된 6·25전쟁이 터졌을 당시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전남 담양군에 주둔했던 국군 중대장이던 선친은 후퇴했으나, 국군 가족이라고 하여 인민군 병사가 나와 사택을 감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따발총을 든 인민군 병사가 무서웠으나 이내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비슷한 또래였기 때문이다. 신기해 보인 따발총을 분해도 해보이던 그는 3월까지 평양 고급제1중학교 4학년 재학 중 갑자기 소집되어 인민군이 됐다고 들려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보다 불과 두 살 더 많은 그는 서너 달 전만도 학교엘 다니다가 남침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따발총 말인데 원래는 다발총(多發銃)이다. 50발이 장전됐기 때문에 ‘따르르’하고 쏘아대면 근거리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당시로서는 인민군만 가진 신무기였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되는 건 분해 해 보인 총기 내부 구조는 무척 간단했다는 점이다.

낙동강 전선이 한창일 때 남쪽 장정들을 군인민위원회에서 강제 징집한 것이 이른바 의용군이다. 그 무렵 중학교 3학년 부터는 의용군 징집 대상이 됐었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로부터 “양은이 너는 까닥하면 아버지하고 맞총질하겠다”며 걱정삼은 놀림을 받기도 했다. 끌려가면 겨우 총쏘는 것만 배우고 이내 전선에 투입됐다. 한 마디로 인민군들 총알 받이가 의용군이었던 것이다.

그땐 잘 몰랐으나 한달 쯤 사택을 지키던 인민군 병사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것은 전황이 급박해져 부대가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병사가 아니고 전사다. 인민군은 장교는 군관이라고 하고, 병사는 전사라고 한다.

그 전사는 전선에서 국군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죄인이지, 그는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생각되는 것은 나나, 그 전사나 얼굴에 복숭아 털이 가시지 않은 소년이었다는 사실이다.

6·25가 다가오면 문득 생각나는 게 그 전사의 생사 여부다. 전쟁에서 죽지않고 살았다면 많이 늙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내 머리엔 “전쟁이 끝나면 빨리 학교로 되돌아가 공부하고 싶다”며 미소짓던 소년 전사의 얼굴로 남아 있다. 전쟁은 참으로 무섭다.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든 용서 될 수가 없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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