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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작은 홀에서 한 연주였는데 앞의 것은 기악, 뒤의 것은 성악이었는데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독주자가 아니라 반주자 얘기다. 앞의 날의 기악 연주자는 상당히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문제는 반주에 있었다. 반주가 독주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지 못하고 소극적인 보조 역할만 하거나 질질 끌려다니면 그것처럼 독주자를 피곤하게 하는 것이 없는데 이날 반주자는 오히려 반대로 독주자를 찍어누르려 하고 있었다. 사운드에 대한 감각이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우당탕퉁탕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댔고 일단 터치가 이러하니 독주자와의 호흡은커녕 템포며 리듬이며 음악성을 따지고 어쩌고 할 차원이 아니었다. 성질 팔팔한 독주자를 만났더라면 연주를 중도에 집어치우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으니 듣고 앉아있던 나는 진땀이 바작바작 나고 조마조마해서 편안히 음악을 감상할 수가 없었다.
휴식 시간이 되자 나는 자동적으로 프로그램에 적힌 반주자의 경력을 훑어보았다. 외국 유명 음악학교 출신이다. 아하, 과연! 이 정도 학벌이라야 독주자와 걸맞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학벌이 좋으니 여기저기 바쁘게 다녔을 터이고 그러다보니 연습할 시간이 없었을지도….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이것은 시간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반주자가 연주의 반을 책임져야 한다는 기본적 인식이 안되어 있는 것이다.
이튿날 성악 리사이틀의 반주자는 아예 경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프로그램에도 경력이 써 있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는 서울의 어느 음악대학을 오래 전에 졸업했을 뿐이고 외국 음대에서 공부해 본 적이 없으니 어디 강사도 할 기회도 없었다. 시부모와 아이들 뒷바라지하기에도 벅찬 가정주부 노릇만 해왔고 그러다 보니 음악계와는 인맥을 형성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 리사이틀의 반주를 맡은 이유는 바로 성악가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이 시작된 직후 나는 성악가가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부인을 반주자로 썼으리라 지레 짐작한 나의 속된 선입견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랍게도 반주는 근래에 드물게 들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의 연주였다. 곡이 바뀔 때마다 분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노래가 편안히 뛰놀 카페트를 지체 없이 깔아주고 있었다. 노래가 나올 때 함께 부르고 함께 산책하고 함께 명랑한 웃음을 웃었고 노래가 전면에 나와야 할 때는 넌지시 숨었다가 노래가 쉬면 어느 틈에 앞으로 나와 노래를 대신했다. 노래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으면 살짝 옷깃을 뒤로 당겼다가 노래가 약간 게으름을 피우면 팔을 잡아당기며 귀엽게 달렸다.
이날 연주를 들으며 나는 볼룸댄서 한 쌍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소 띤 얼굴로 남편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들여다보며 춤추는 우아한 부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노래는 반주만큼 잘 하는 것이었나? 반주를 열심히 들었던 까닭에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남들이 남편을 비평하지 못하도록 재치를 부리는 것도 아내의 역할 아니던가?
학력, 경력을 늘어놓지 않으면 음악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풍토에서 두 연주는 내게 교훈을 주었고 내 안에서 아직 확고하지 못했던 무엇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조성진 성남아트센터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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