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강성(新疆省)은 러시아 몽골 아프가니스탄 등과 국경을 접한 최서단이다. 고산과 초원 그리고 사막으로 형성됐다. 기원 전후 중국과 지중해 연안을 이은 내륙 아시아 횡단의 고대 통상로 중 요충지였다. 그러나 해상교통의 발달로 수 세기동안 번창을 누리던 실크로드가 쇠퇴하면서 신강성은 별 볼일 없는 땅으로 전락했다.
고대 중국의 유방이 초패왕 항우에게 밀려 그 당시 최대의 오지인 지금의 사천성 중부 파촉(巴蜀)으로 쫓겨간 땅보다 더 변방인 것이 신강성이다. 오늘날은 금·은·철·석유·석탄 등 지하자원이 풍부한 중국의 보고로 꼽히지만 예전엔 거의 버려진 땅이였다.
버려지다시피한 땅에 지금 터키계 종족이 주민의 대부분을 이룬 것은 중세기의 십자군전쟁에 연유한다.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 순례를 처음엔 이곳 원주민인 아랍인들이 방해하지 않았으나, 11세기 들어 이 지역을 점령한 터키가 기독교도의 순례에 거부 반응을 나타내어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성지 회복을 제창하며 일으킨 것이 십자군 운동이다. 1096년 시작된 십자군전쟁은 1270년까지 무려 174년 동안에 대규모 원정만도 8회나 거듭했지만 터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끝내 실패했다.
그런데 터키 진영에서도 오랜 전쟁에 염증을 느껴 터키를 이탈한 일련의 부대가 있었다. 행방불명으로 알려졌던 그 부대가 마침내 정착한 곳이 바로 신강성인 것이다.
이들의 후손인 신강성 터키계 위구르(uyghur)족은 생김새도 터키인과 같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터키와 비슷한 고유의 문자와 말과 풍습을 지녔다.
위구르인의 한족(漢族) 여성 강간설의 유언비어가 발단이 된 대규모 유혈사태는 양측에 큰 인명 살상의 피해를 내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었다. 이의 강경 진압에 나선 중국 정부를 터키 정부는 “위구르족 사태는 중국 정부의 대학살”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위구르족과 한족의 감정 싸움에서 터키가 위구르편을 든 것은 피는 역시 진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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