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부자’의 아들들

무척 부지런한 사장이 있었다. 시외버스 사장이다. 새벽에 다른 직원보다 먼저 출근해 차량 점검이며 사무실 등의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챙기곤 했다. 부실한 점이 있으면 직접 손질을 하기도 했다.

광주(光州)여객 사장이 이랬다. 1945년 광복 직후다. 그 무렵은 100리 길은 걷기가 예사였다. 이러던 참에 시외버스의 출현은 경이적인 교통수단이었던 것이다. 버스라고 해서 지금같은 버스가 아니다. 일제 때 썼던 도요타 트럭 같은 것을 드럼통을 편 철판 용접으로 겨우 버스 모양을 갖췄다. 이렇다 보니 의자는 나무 의자고, 차창은 있지만 창문은 없이 커튼같은 걸로 차창을 가렸다. 그러니까 승객이 운행 중 창밖을 보려면 덜렁거리는 커튼을 제쳐보곤 하였다.

도로는 국도도 아스팔트 길이 아니고 온통 자갈모래를 깐 비포장 도로 일색이므로 차가 지나가면 먼지투성이가 되곤 했다. 도로 여건도 차량운행에 대비한 안전대책이라고는 전혀 없어 열악하기가 짝이 없었다. 이런데도 ‘운수(運輸)사업은 운수(運數)’라는 데, 별 사고 없이 버스사업이 잘 되어 돈을 무척 많이 벌었다. 광주여객 사장을 가리켜 사람들은 ‘먼지부자’라고 불렀다.

초창기의 광주여객은 구 광주역사 역전통에 있었는 데, 그 ‘먼지부자’가 바로 금호그룹 창업주인 고(故) 박인천(朴仁天)씨다. 금호그룹은 광주여객이 모태이고 금호(錦湖)는 고인의 아호다.

캐캐묵은 얘길 장황하게 꺼내는 것은 이러한 금호그룹이 ‘형제의 난’을 겪고 있어서다. 결국 경영 일선에서 동반 퇴진했다는 박상구씨는 고인의 3남이고 박찬구씨는 4남이다. 창업주 박인천씨는 1984년에 세상을 떴다.

얽히고 설킨 그룹 내부의 갈등을 여기에 옮길 필요는 없다. 각기 또한 입장이 있을 것이다. 다만 생각되는 것은 ‘수성(守城)이 창업보다(創業)보다 어렵다’는 말이 실감 나는 것이다. 아버지가 ‘먼지부자’였을 적에 박상구씨는 20대초반의 청년이었고, 박찬구씨는 세살난 아기였다. 혼백이 있어 저승의 아버지가 이승의 형제를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 우애를 다지는 화해를 질책삼아권고할 것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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