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독재에 맞서 가시밭길… 민주주의 꽃피운 ‘忍冬草’

이용성·구예리기자 leeys@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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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만장한 영욕의 세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으로 파란만장했던 영욕의 삶을 살았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의지는 투옥과 연금, 망명의 고통을 딛고 마침내 인동초(人冬草)처럼 피어올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열매를 맺었지만 남북화해라는 화두는 미완의 유업으로 남았다.

◇소작농의 아들이 정치인의 길로

목포 앞바다에 솟아있는 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 전대통령은 교육열이 남다른 어머니가 전답을 팔아 뒷바라지해 준 덕분으로 목포로 유학해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합격했다.

청년실업가로 성장한 그는 해방공간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환멸을 느껴 탈퇴했지만 건준에 몸을 담은 이력은 그를 평생 ‘색깔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 우익반동이란 이유로 공산당에 붙잡혀 투옥됐으나 총살 직전에 탈출, 생애 5번의 죽을 고비 중 첫번째 고비를 극적으로 넘겼다.

이러한 그의 정계 입문 과정은 3전4기 끝에 성공한 그의 대권도전사와 닮은꼴이다.

제3대 민의원 선거(1954년) 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쓴 잔을 마신 그는1956년 장 면 박사가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연거푸 민의원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4.19 혁명으로 이듬해 5월 다시 치러진 인제 보선에서 생애 첫 금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당선된 지 사흘 만에 5.16 군사정변이 나는 바람에 선서 한번 못해보고 의원직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 1962년 YWCA 연합회 총무로 활동하던 미국 유학파인 이희호 여사와 재혼, 가정적으로 안정을 되찾았고, 1963년 6대 총선 때 목포로 지역구를 옮겨 금배지를 달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발을 디뎠다.

1964년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 때에는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연설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해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좌절과 재기가 반복된 대권도전사

1967년 7대 총선에 당선된 뒤 그해 5월 한평생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원내총무 경선에서 첫 대결을 펼치지만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의원의 막판 지원으로 YS를 누르고 이듬해 대선에 나섰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95만표차로 석패했다.

이후 긴 가시밭길에 들어서면서 유신이 선포된 1972년부터 1987년 6.29 선언까지 17년의 시간은 납치와 망명, 투옥, 연금으로 점철된 암울했던 시기였다.

특히 1973년 일본 도쿄에서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납치돼 수장당할 뻔했으나 미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살아났는가 하면 1974년에는 명동성당에서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했다가 3년간 복역한 뒤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복권, 정치일선에 컴백했지만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다시민주화의 꽃을 피우려던 그의 꿈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무산됐고,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후 군사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사형에서 무기,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돼 죽음의 그림자에서 또 한 번 벗어났지만 1982년말 미국으로 쓸쓸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군사정권의 숱한 탄압에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그의 의지는 1987년 6월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밑거름이 됐다.

◇양김 분열 후 정권교체까지

그는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했다.

대선에서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치면서 민주진영으로부터 지역주의에 기댄 야권 분열의 책임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지난 1988년 총선에서 호남지역을 싹쓸이하면서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 재기하는가 싶더니 1990년 3당 합당으로 입지가 다시 좁아졌다가 1991년 9월 YS가 떠난 민주당의 이기택씨와 야권통합을 성사시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1992년 12월 대선에서 YS에게 패해 대권 3수에 실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홀연히 영국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1995년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호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정치전면에 복귀했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 정권의 최대 실세였던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 손잡으면서 ‘DJP 공조’는 외환위기를 맞아 ‘준비된 대통령’ 탄생을 갈망하는 국민 여론을 타고 정권교체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DJ정부 출범…불운했던 말년

대선 승리의 감격을 누릴 여유도 없이 당선 다음날부터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김대중 정부는 5년 동안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분단의 벽을 허물어 남북화해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견제,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측근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져나오면서 YS처럼 조기 레임덕에 빠지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특히 대통령의 아들들과 `2인자'로 불렸던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비리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등 각종 비리의혹 사건은 정권의 도덕성에 큰타격을 입혔다.

퇴임 후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노무현 정부 시작부터 몰아닥친 대북송금 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 성과에 흠집이 가고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측근들이 ‘영어의 몸’이 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외부활동과 정치적 발언을 통해 건재를 과시했다.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사태가 터지자 “북미관계가 안 돼서 진전을 하지 못한 것”이라며 햇볕정책 책임론을 반박했고, 2007년 대선 전에는 여당의 대통합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한마디’는 퇴임 후에도 민주당과 전통적 지지층에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위기에 빠졌다고 비판하면서 민주개혁세력의 연대를 주문하는 등 왕성한 정치활동 때문에 현실 정치 개입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용성·구예리기자 leeys@kgib.co.kr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서거한 가운데 동교동계로 불리는 ‘김 전 대통령의 사람들’에게 관심이 몰리고 있다.

동교동계는 김 전 대통령의 집이 동교동이었던 것에서 생겨난 동교동계는 유신시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집인 상도동계와 더불어 측근 인사들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표현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인물은 단연 박지원 민주당 의원으로 마지막까지 김 전 대통령의 병상을 지키며 대변인 역할을 자임해왔다.

김 전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듯 했으나 지난 총선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최근에는 지난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청문회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김 전 대통령과 민주당을 잇는 중요 인사로 부각됐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추미애 민주당 의원 역시 김 전 대통령의 사람이다.

평소 김 전 대통령의 ‘수양딸’로 불릴 만큼 김 전 대통령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던 추 의원은 지난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 경선에 출마하기도 했으며 최근 민주당내에서 정세균 대표 못지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함께 ‘리틀 DJ’로 불렸던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광주 북갑 총선에서 386 운동권 출신의 강기정 의원에게 패해 정치무대 복귀에 실패했고, 권노갑 최재승 이훈평 전 의원은 정치자금법 및 선거법 위반 혹은 개인 비리로 정치 복귀가 어려운 실정이다.

이들은 김 전 대통령이 입원하자 지난 2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권노갑 전 의원과 남궁진 전 의원도 미국에서 급히 들어왔다.

이 밖에도 한광옥 윤철상 김옥두 설훈 전 의원, 김홍일 전 의원의 처남인 윤흥렬 씨 등 동교동계 인사 20~30명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원에 모여서 김 전 대통령의 병상을 마지막까지 지켰다./장충식기자 jcs@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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