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노하셨다

 

우리글로 신문 만들고, 우리말로 방송한다. 이런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론 보도가 많다고 한다. 상당한 식자층에서도 이런 말이 나온다. 언론이 영어를 남발하기 때문이다. 외래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적 영어가 범람하고, 심지어는 무리한 조어가 판친다.

 

예를 든다. ‘에듀타운’ ‘멀티테크노밸리’ ‘에코스테이션’ ‘팜스테이’ ‘워킹푸어’ ‘바이오밸리’ ‘투모로우 시티’ ‘브레인 시티’ ‘버킷 리스트’ ‘디자인 페스티벌’ ‘에어파크’ 등 들자면 한량없다. 이런 신문 제목이 또 있다. ‘네이키드 뉴스 코리아 국내 론칭… 섹시 앵커 첫 공개, 누드·란제리룩 수위조절 어덜트 틴버전 홈피방송’ 알아볼 독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스마트 그리드’를 지능형 전력망, ‘네크로필리아’를 시신유골애착도착증, ‘기프트 카드’를 상품권이라고 하면 어디가 덧나는지, 굳이 생소한 영어 표기에 집착한다.

국제화시대이긴 하다. 하지만 원어민 영어 숙지에 열 올릴 만큼 영어교육에 갖는 열기는 대외 경쟁력 강화를 위한 것이지, 우리끼리 우리말을 팽개쳐 가면서 써먹기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 언론의 이런 영어 과잉은 그래야 더 유식한 것으로 잘못 여기는 영어사대주의 발상이다.

 

하긴, 언론도 할 말은 있다. 정부나 자치단체에서 그렇게 쓰니 그대로 보도할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예컨대 청와대 발표에서도 ‘그랜드 바겐’이라고 했다. 이는 외교 용어이므로 청와대는 ‘그랜드 바겐’이라고 하더라도, 언론은 ‘일괄 타결’이라고 보도하는 것이 국적 있는 신문·방송인 것이다.

 

취재원에서 영어 표기가 있었다 할지라도 신문이나 방송은 보도에 우리말로 풀어 독자와 시청자들이 알기 쉽게 하는 것이 언론 본연의 소임이다.

 

특히 신문 제작에 쓰이는 한글을 들어 말하겠다. 인도네시아 부톤섬의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은 문자가 없어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 자기네 말을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 일본 요미우리신문 등이 ‘경이적인 문자 수출’이라며 한글을 배우고 있는 학교를 찾아 현지 보도했다. 일본방송 NHK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섰다.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문도 ‘세계의 이목을 끈다’며 이례적으로 ‘남조선’을 극찬했다. 정작 국내 언론은 잠잠하다.

 

내일은 한글날이다. 563년 전인 1446년(세종 28년)에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친히 훈민정음을 반포하신 것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이다. 한글의 우수성은 이미 나라 밖까지 정평이 나 있다. 창제된 28자의 자모는 발음의 초성·중성·종성을 음상화(音像化)하고, 또한 우주의 오행(五行)과 연관됐다. 발성과 표기가 과학화됐을 뿐만이 아니라, 심오한 우주철학이 깃들어 있다.

 

이토록 위대한 우리의 한글로 신문을 만들면서 잘 알아듣지 못할 영어말을 써대는 것은 한글에 대한 모독이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중략) 어리석은 백성들이 (한문을 몰라)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이에 28자를 만드노니’(필자 주석)라고 하였다. 그런데 대왕의 후대인 이 시대의 우매한 언론은 보도에 영어를 남발해 한글 창제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

이번 한글날엔 서울 광화문에 우뚝 선 초대형의 세종대왕 동상이 제막된다. 지난 5일 심야에 이미 모셔 놔서 당일엔 제막식과 함께 국민에게 공개되는 것이다. 나랏글을 만드신 대왕의 위업을 기리는 동상은 항상 우릴 굽어보고 계시게 된다.

 

신문에 민초들이 잘 모를 영어를 한글로 써대는 것을 보는 세종대왕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중국글(한문)을 모르는 백성이 많아 우리의 한글을 만들었더니, 이젠 우리의 글로 써대는 민초들이 모르는 영어투성이를 몹시 괘씸하게 여기실 것 같다.

 

한글날에 즈음한 세종대왕의 동상 제막식을 앞두고 우린 우리의 나랏글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날이 갈수록 신문의 한글 표기 영어가 늘다 못해, 아예 알파벳 영자표기 영어까지 버젓이 나오는 판이다. 영자신문도 아닌 우리의 한글신문이 영어에 잠식당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더 이상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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