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에 버릴 수 있었던 나, 최용신

1935년 1월23일 0시20분. 25년 6개월의 짧은 생애의 한 젊은 여성이 생을 거둔 시간이다.

 

‘친가가 있는 원산에서는 그녀의 시신을 옮겨 원산의 선산에다 장례를 치르겠다고 했으나, 약혼자 김학준의 집에서는 이미 약혼한 지 10년이 넘었으므로 내 집 사람이나 다름없다 하여 자기들의 선산에다 묻을 것을 주장하고 나왔다. 그러나 샘골 사람들이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례식을 샘골의 동리 장으로 하겠다면서 그녀의 유언대로 샘골학원 근처에 묘 자리를 잡겠다고 하면서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소설 ‘상록수’에 등장하는 농촌계몽운동의 상징인 최용신이 사망하던 당시의 풍경이다. 친가와 약혼자의 집, 샘골마을 사람들 간에 실랑이가 있었지만 샘골마을 사람들의 완강한 요구를 끝내 꺾을 수는 없었다.

 

최용신이 샘골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던 1930년대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더욱 강화돼 가던 시기였다. 소작농민에게 그 시절은 일제와 지주계급의 억압과 착취가 끊이지 않는 어둠과 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빛이 어둠에 가려질 때 최용신은 ‘이 작은 몸뚱이를 남김없이 태워 태고연(太古然)한 이 마을을 밝혀 보리라’ 는 결심을 하고 샘골마을에 들어섰다. 3년여 짧은 시간이었지만 샘골 강습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문맹타파를 위한 야학을 운영하고, 자금을 모금해 샘골학원을 건축하는 등 농촌마을 샘골의 빛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최용신의 러브스토리는 샘골 마을 사람들에게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학교를 다니던 17살의 최용신은 ‘농촌에서 가정을 이루고 협력하여 활동할 수 있다’며 끈질기게 청혼하던 동네 청년 김학준과 약혼을 한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혹사하며 남을 돌보던 최용신은 병을 얻었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관 뚜껑을 열어 시신을 끌어안고 영혼결혼식이라도 해야겠다던 약혼자 김학준! 두 사람의 10년간의 약혼은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최용신의 뜻을 이은 김학준의 활동과 끝내 죽어 최용신의 옆에 무덤을 같이한 둘의 사랑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잔잔하게 울린다.

 

샘골에 있던 3년여 동안의 농촌계몽운동, 이것만으로는 최용신을 모두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일지 모르겠다. 최용신이 병든 와중에도 “드러누워 있더라도 좋으니 샘골로 곧 오라”고 했던 샘골마을 사람들. “병환으로 꼼짝도 못하고 누워 계셨지만 마을은 제자리를 잡게 되고 불안이 밝게 개 만사가 순조롭게 되었다”고 당시 마을 주민이 증언할 만큼 샘골 사람들의 최용신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지극했다. 그녀는 어느 한 시기에 사랑받던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지금도 기억되는 모두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사랑은 외사랑이 아닌, 서로 주고받으며 계속 기억하고 싶은 특별한 사랑이 될 수 있었다.

 

올해는 최용신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와 때를 같이해 ‘상록수 최용신, 기억 속에서 아시아로 걸어나오다’라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린다.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중국 등 아시아의 여성 운동을 돌아보고, 최용신에 대한 기억을 여러 시각으로 떠올려 보고자, 농촌계몽운동의 상징 최용신을 아시아 여성사회운동가로 되새기려는 것이다.

 

이 시대에 최용신과 같은 인물이 우리 곁에 다시 한 번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그래서 농촌계몽운동가이며 여성사회운동가인 최용신이 지금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박병은 역사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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