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하나 없는 사람입니다

사회 구성 주인공으로 인정 받아야 장애 특성으로 자신을 알리는 이들

성서의 깊은 뜻을 잘 모르는 제가 한 가지 냉소적인 언급을 하고 싶습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벌였는데 초대받은 많은 사람들이 장가를 가야한다, 밭을 사야한다는 등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오지를 않습니다. 잔치에 별로 생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자 화가 난 주인이 길거리에 나가 여러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불러 잔치 자리를 채우라 했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때 닥치는 대로 부름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대다수는 힘없고 별 볼일 없는 장애인들이었습니다. 그 모습도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가난한 자들, 불구자와 소경들, 다리를 저는 자들 등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왜 초대를 받았는지 모른 채 쭈빗거리며 잔치마당을 들어섭니다. 그저 이름없는 사회의 비주류로 지내다가 잔치상의 대타로 등장하게 되지요,

 

얼마 전 수원역 맞은편에 있는 구두미화소에서 구두를 닦았습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사장님입니다. 얼핏 보니 열심히 구두를 닦고 있는 아저씨 어깨 너머로 자일에 의지해 암벽등반을 하는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아저씨인데 어딘지 모르게 자세가 어색합니다. 그제서야 나는 아저씨가 왼팔이 없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어렸을 때 탈곡기의 벨트에 걸려 큰 사고가 난 후 그의 인생은 여러가지로 굴곡진 길을 힘들게 걸어야 했다고 합니다. 장애인이 된 후 무엇이 가장 힘들었느냐는 의례적인 말에 피식 웃음으로 막아서고는 그래도 자기는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하고 싶은 것은 조금씩 다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비교적 고난도의 등산과 테니스, 그리고 수영 등은 모두 그가 하고 싶어서 해온 활동들입니다. 수원지역 산악인의 저변이 의외로 넓다는 공감하에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산악인을 언급하니 아주 잘 아는 사이라고 합니다. 전화로 그를 바꿔 주니 대뜸 ‘저 잘 아시죠? 팔 하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합니다. 반갑게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그가 자기이름을 말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의 특성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린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들도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의미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는 있는 이름도 부르기를 주저한 듯 합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팔이 없는 사람인 것을 알고는 들어오려다가 그냥 간다고 합니다. 이처럼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사회로 하여금 손님들을 장애인의 바깥에서 빙빙 돌거나 힐끗거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자기이름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서 꽃이 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며,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을까 두려워 스스로 자기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입니다. 각자의 생김새와 가진 능력은 다를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의 이름을 정겹게 불러야겠습니다. 비단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들과 티없이 자라는 어린아이들, 이국땅에서 힘들게 새로운 꿈을 꾸는 다문화가정의 외국인들, 소년소녀 가장들, 미혼모들, 모두가 고유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나라 잔치에 마지못해 온 사람이 아니라 주인공으로서 초대받고 싶어 합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동전으로 잔돈을 거슬러주는 것을 미안해하는 그의 마음을 가슴에 담으며 길을 나서니 따뜻한 이름들이 살아나듯 백화점의 화려한 조명이 찬 겨울을 환하게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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