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셋값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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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專貰)제도는 외국의 입법례에선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고유하게 발달한 부동산 거래라고 한다. 조선총독부가 1910년대 작성한 ‘관습조사보고서(慣習調査報告書)’에 따르면 “전세란 조선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가옥 임대차의 방법으로서 임차할 때 차주(借主)로부터 일정한 금액(가옥의 대가의 반액 내지 7, 8分인 경우를 통례로 한다)을 가옥 소유자에게 기탁하여 별도로 차임(借賃)을 지불하지 않고 가옥반환 시에 그 금액의 반환을 받는 것이다” 라고 적혀 있다.

 

당시 경성, 지금의 수도권을 중심으로 많은 급전이 필요했던 양반들 사이에서 이뤄졌던 거래다. 전세 제도는 우리나라 경제가 고도 성장했던 1980 ~90년대에 완전히 고착화됐다. 80년대 전셋값은 집값의 50% 정도였다. 2억원짜리 집을 전세로 내놓으면 보통 1억원을 전세금으로 받았다. 당시 은행 금리는 연 10~15%를 넘어섰다. 예컨대 1억원을 은행에 예금하면 이자만 1천만원(10% 기준), 매달 약 80만원의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국민소득 1만달러가 넘으면 이자율이 10% 밑으로 내려가 자연스럽게 미국, 일본처럼 렌트 개념의 월세제도가 전세를 대체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금리가 5%대로 떨어졌는데도 예측은 빗나갔다. 집값 상승의 수익 구조가 그 이유다.

 

새집을 샀을 때 초기비용이 많이 들어가는데, 보통 전세금을 받아서 초기비용에 메워 넣는다. 무이자로 대출받는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금융권 대출+전세금까지 합해져서 레버리지가 높아진다. 집값이 상승할 경우, 레버리지 효과로 투자비용 대비 수입금액은 이른바 ‘따블’이 되는 기대감이 생긴다. 이 때문에 내집 마련의 꿈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전세를 끼고 주택을 사는 것이 다른 투자 대안들을 앞지른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전세를 얻는 무주택자들이다. 근래 수도권 전셋값이 치솟아 주택 매매가의 71%를 넘는 곳도 나오고 있다. 매매가가 1억7천만원 선인데 전셋값이 1억2천만원이면 심각한 일이다. 전세를 놓는 주택 소유자와 전세를 얻는 무주택자의 입장은 다르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세 제도를 갖고 있다는 게 좋은 현상은 아닌듯 싶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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