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곡리 선사유적지와 원술랑

올해는 천안함 사태로 인한 국민정서를 감안해 8월로 연기됐지만, 해마다 5월이면, 어린이날을 전후로 연천에서는 연천전곡리구석기축제가 열린다. 올해로 18회를 맞는 이 축제는 석기 만들기나 불 피우기, 돼지 잡기 등 구석기시대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흥미롭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 매년 수만 명이 참가하고 있다.

 

연천 전곡리 일대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구석기시대 유적지로 잘 알려져 있다. 1978년 미군병사가 처음 주먹도끼를 발견한 이래 1979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 주먹도끼, 사냥돌, 주먹찌르개, 긁개, 홈날찌르개 등 수천 여 점의 다양한 석기가 발견됐다.

 

전곡리 선사유적지의 형성 시기는 대략 20만년 전인 전기구석기 후기로 보는 견해가 유력한데 양날떼기 기법을 갖춘 아슐리안 석기 형태의 주먹도끼와 박편도끼가 동북아시아 최초로 발견된 유적지로 주목 받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약 80만㎡가 사적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이처럼 화려한(?) 구석기의 명성에 가려 전곡리 선사유적지 일대에 전곡리토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둘레가 약 2km, 흙으로 판축된 이 토성은 발굴 조사 결과 고구려성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토성이 우리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매초성터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매초성은 신라와 당나라가 벌인 나당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675년, 당나라 장군 이근행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매초성에 주둔하며 보급품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맞추어 임진강 하구에서 지키고 있던 신라군은 40여 척의 당나라 보급선단을 궤멸시키고 여세를 몰아서 매초성 공격을 감행한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군마 3만380필과 수많은 병장기를 획득하며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이 매초성 전투에는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참전했다. 원술은 매초성 전투가 있기 3년 전 석문(황해도 서흥 지방) 전투에서 간신히 목숨만 살아 돌아왔다.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훈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겠습니다’며 전장에서 돌아온 아들의 목 베기를 주장한다. 문무왕은 그를 용서해 주었으나 원술은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 얼굴을 대하지 못하게 된다.

 

명예를 회복할 날을 기다리던 원술은 매초성 전투에 참여해 큰 공을 세우고 포상을 받는다. 그러나 아버지 김유신은 이미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분하고 한스럽게 여긴 원술은 죽을 때까지 벼슬을 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석기를 만들어 동물을 사냥하고 불을 지피는 구석기인들의 생활 모습과 화랑의 명예를 회복하고, 부모에게 버림받은 한을 풀기 위해 목숨 걸고 적을 물리쳤을 원술랑의 일화 중 어느 것이 더 감동적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 인물이며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풍부한 문화적 콘텐츠를 가진 원술랑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올해도 연천전곡리구석기축제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될 것이다. 축제의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지 모르지만, 전곡리 벌판에서 벌어졌던 매초성전투와 전투에 참여했던 원술랑과 관련된 작은 코너라도 마련하면 축제의 내용이 좀 더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다. ‘끝까지 싸우지 않고 도망하였으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며 끝내 아들의 비굴함을 거부했던 김유신 장군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 생각해 본다.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 문화재지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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