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세계화와 정보화 사회를 바탕으로 급격한 변화가 쉴 새 없이 추구되는 특징을 보인다. 아울러 개인의 개성과 다양성이 무한히 존중되는 시대이며 조직보다는 개인을 우선가치에 두고 획일적인 사고방식보다는 독창적인 창의성을 높게 평가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높게 추구해온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부모에 대한 효성과 같은 전통적인 도덕적 가치가 점점 낮게 평가되는 것 같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가운데 세계적으로 유래없이 성공한 국가의 한 시민으로 자라온 필자는 시대에 따라 자기 정체성과 추구해야 할 사회적 가치에 혼란이 많았다. 이제는 필자도 인생을 보다 깊게 바라볼 수 있는 외연이 열려서인가? 화려한 5월을 보내는 이즈음 불현듯 잊고 지낸 지나간 일들이 생각난다.

 

‘충신’이란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화려한 5월이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흔히 5월을 감사의 달이라고 한다.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바르게 지도해 주시는 스승님께 존경과 감사를 드리는 때이기도 하다. 부부의 날도 있다. 일생을 함께 살아가는 반려자에게 서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고마움을 나타내는 날이기도 하다. 모두가 감사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부모님만은 못한가 보다.

 

아버지의 고향은 이북이었다. 폭발사고로 유명한 평북 용천이 바로 아버지가 태어난 곳으로 나의 원적이기도 하다. 삼팔선이 생긴 직후에 월남하여 경상도에서 터전을 잡고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외지에서 믿을 것은 자식밖에 없다는 신념을 직접 실천하신 아버지 때문에 나는 본의 아니게 8남매의 장남이 된다. 어수선한 육이오를 전후하여 아주 젊은 나이에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했다.

 

어린 동생들과 함께 일본인들이 거주하다 물러간 커다란 사택에서 생활하며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는 연고 없는 외지에서 교육자로 성공한 사실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나 보다. 앞뒤 가리지 않고 일을 하다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과 다툼도 많았다. 그래도 늘 꿋꿋하게 학생들 교육에 전념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나는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런 용맹한 아버지가 무서워 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겨울밤 마당을 가로질러 화장실에 가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유난히 허술한 시골의 재래식 화장실에 나타날 것 같은 이름 모를 샤먼들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곤히 자고 있는 어린 나를 깨워 꼭 화장실 앞에 보초를 세웠다. 볼 일이 길어질수록 나는 추위에 덜덜 떨면서 얼어붙은 밤하늘을 쳐다보며 정령들의 거친 숨결이 사라지도록 조심조심 눈앞의 어둠을 지워갔다. 사방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숨막히는 눈길들이 무서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차가운 별빛들이 시리도록 머물렀다가 폭포처럼 마당으로 쏟아져 내렸다.

 

화장실 보초를 섰던 어린날의 추억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바보였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동생을 탓하며 아버지는 늘 이 말을 하셨다.

 

“충(동생)이란 놈은 불효한 놈이야.”

 

“우(본인)야는 충신이로고.”

 

나는 ‘충신(효자)’이란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서움을 의무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문을 나서 장승처럼 화장실을 지켰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동생도 몇 년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매일 밤을 내복차림으로 서있던 그때가 그립다.  /김우 자혜학교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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