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와 종손의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
‘소박한 흔적만 남은 종가를 지키고 있는 종손의 꼿꼿한 풍모와 종부의 강인함에서 숙연함을 느낀다.’(이연자 저 ‘명문 종가 사람들’ 중)
단순한 ‘고택(古宅) 지킴이’가 아닌,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선인들의 숭고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종손·종부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특히 종갓집 사람들에게 면면히 내려오는 정신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곧 높은 사회적 신분에 맞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일이었기에 그대로 감동이 된다.
세상 풍파와 잇속에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선비정신을 계승해온 종손은 각별하게 반듯한 삶을 살아야 했다. 두 칸짜리 초가도 넉넉히 여겼던 오리 정승의 370년 전 유언에 따라 종택을 박물관으로 꾸민 이원익 종가, 안채 대청마루에 애지중지 모아두었던 유물 1만여점을 소수박물관에 기증한 연안 김씨 만취당파 괴헌 종가, 공직자의 녹봉은 백성의 혈세이니만큼 검소해야 한다는 황희 정승의 청백리 정신을 가풍으로 여기며 종가를 지키는 장수 황씨 황희정승의 21대 종손의 모습은 꿋꿋하기만 했다.
어디 종부의 삶만 그렇겠는가. 종가에 시집 온 종부들의 삶 또한 고단했다. 적장자를 출산해 종손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하는 ‘최우선의 임무’ 외에, 끝나지 않는 집안정리와 일일 평균잡아 20여명이 넘게 드나드는 손님맞이와 달마다 찾아오는 기제사와 시제사까지 종가의 대·소사를 두루 챙겨야만 했다.
나이가 들고 종가의 웃어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종가의 큰 살림을 도맡는 등 문중 내 역할도 컸다. 이 때문에 여성들 사이에서 종부가 되는 일은 단순히 시집살이 이상의 자긍심과 각오를 수반했다.
그러했기에 문중의 어느집을 방문하더라도 나이가 꽤 많은 집안 어르신마저 웃목을 내주며 “종부님, 종손님 오셨냐”며 하대하지 않고 깍듯이 접대했다. 집안의 맥을 잇는 핵심인물인 종부와 종손의 값어치를 제대로 평가했던 것.
비록 오늘날에는 그 전통이 미비해 종부와 종손을 하대하거나 소홀히 대접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저 웃음과 넓은 아량으로 품어내는 종부와 종손이 있기에 종가집은 언제나 건재하다.
대하 소설 ‘혼불’은 구한말 몰락해가는 양반가를 지키려는 종갓집 며느리 3대의 애환을 그린 고(故) 최명희의 소설이다. 혼불은 영혼의 밝음이다. 종가의 혼불이 꺼지지 않고 대를 이어가는 이유, 바로 종부와 종손의 옛 것을 소중히 여기는 흔들리지 않는 ‘고집’때문이 아닐까.
# 실학자 박세당 종가 12대 종부 김인순씨의 설맞이
“명절엔 기쁜 마음으로 정성으로 준비”
보름앞으로 훌쩍 다가온 설. 명절준비에 한창인 의정부시 장암동에 소재한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선생의 종가를 찾은 1월18일 오전. 눈 덮인 산야를 자랑하는 깍아지른 듯한 수리산을 앞마당 삼아 설경이 멋드러지게 펼쳐진 종가는 종부의 너른 마음마냥 푸근하고 넉넉하다.
서울이면 옛 명성대로 조선의 중심지인 한양이 자리한 곳. 당연히 세도 당당한 양반댁들의 고상한 취미와 건축양식, 생활습관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곳이어야하지만 경제개발의 논리에 파묻혀 전통의 한자락 남지 않고 대부분 현대사회의 자취아래 전통이 묻힌지 오래다.
그러나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에 묶인것이 다행인지, 서계 박세당 종가의 49만5천867여㎥(15만평) 너른 부지는 옛 모양 그대로 온전하다.
물론 종택이 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는 않다. 6·25전쟁 후유증으로 솟을대문도 사라지고, 안채와 행랑채마저 소실됐지만, 사랑채(경기문화재자료 제93호)는 300년 넘는 세월을 꿋꿋히 버티고 있다. 그리고 사랑채 앞 마당엔 서계선생이 300년 전에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사랑채와 죽마고우마냥 같은 세월을 넘기며 자리하고 있다.
그 세월만큼 종가의 멋과 맛, 가풍을 지켜온 이가 바로 서계 박세당 종가의 종부들로 현재는 제12대 종부인 김인순씨(57)의 몫이다.
설을 보름 정도 남겨놓은 종부의 마음은 여느때보다 바쁘다. 대대로 전해오는 종가의 내림 음식을 빠짐없이 준비해야 하고, 넓디넓은 집안팎 청소며 차례 준비에 손님 챙기기까지 그야말로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다.
“설에는 떡국만 여덜 그릇을 차례상에 떠 놔야 해요. 4대 봉사(奉祀)니까 고조부 내외분부터 증조부, 조부, 시부모까지 네 차례에 걸쳐 차례를 지내고 나면 미리 끓여 놓은 떡국이 퉁퉁 불어 있죠. 시집와서 설마다 불어터진 떡국을 먹다보니 30여년이 어제일처럼 금방이네요.”
인터뷰 내내 손에서 음식을 내려놓지 못하는 종부가 사랑채 마당에서 만들어내는 구수한 냄새때문일까. 백구 두마리가 따뜻한 햇살을 등에 업고 김씨의 밑에서 연신 냄새를 맡아댄다. 그 풍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종손. 그리고 종택 인근에 살아 제사때건 집안행사건 마다않고 언제든 득달같이 달려와 준다는 당숙모(김세령)와 동서(최정자) 사이는 마치 자매처럼 다정해 보인다.
이들 종가의 여인네들은 몰아치는 겨울 칼바람에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추위를 견디면서도 전 지지는 손놀림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한 모양을 만들어낸다. 마치 꼿꼿한 선비의 붓잡는 손놀림마냥 정교하기까지 하다.
“사실 처음 시집와서는 시어머니 가르쳐주시는대로 묵묵히 따라 배우고 익히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고 열심히 배웠지요. 며느리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던 때였어요. 이후 각계의 교수님과 지인들께서 서계 할아버지의 공덕과 훌륭한 업적, 인품을 누누히 칭송해 보전하려는 노력을 후대에까지 이어가야한다시며 전통을 잃지 않고 지켜내온 저희 부부의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땐 어깨가 우쭐해지더라고요. 바로 이 ‘자긍심’이야말로 종손과 종부가 지녀야 할 제일 큰 덕목입니다.”
종부는 일년에 12번(기제사 8번, 설, 추석, 시제, 사당차례) 제사를 치른다고 한다. 제대로 된 제사의례를 지내기 때문에 이날 KBS의 ‘한국인의 밥상’ 촬영팀이 오후에 진행될 기제사의 촬영차 벌써부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년에 12~13번이니 30년 동안 400번도 넘게 차려냈을 제사를 종부는 어떻게 치러냈을까. 한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1주일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한단다. 제사상에는 기본으로 7과(과일 7가지)와 3전(육전, 간·천엽전, 어전), 3탕(육탕, 어탕, 소탕), 3포(육포, 어포, 대구포), 3가지 나물, 갱(북어와 고기를 넣은 국), 국수, 물김치, 식혜, 잡채, 인절미가 오른다.
“김치 담고, 놋제기 꺼내 닦고 마른 음식부터 준비하다 보면 일주일도 부족해요. 그중에서 대추·밤 굄(대추와 밤을 층층이 쌓아 올리는 것)에 가장 손이 많이 가요. 밤을 보통 20㎝ 높이로 쌓아올리는 데 한 말 반이 넘게 깎으려면 서너 명이 붙어서 하루 종일 해도 부족해요. 그래도 설엔 떡국을 내니까 3탕은 안내도 되니 훨씬 수월하죠(웃음)”
지금의 며느리들은 상상도 못할 이런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해내는 내공의 소유자인 종부의 올해 소원은 뭘까.
“소원은 따로 없지요. 살아온 세월처럼 열심히 종가를 지켜내는 것뿐예요. 단지 바람이 있다면 시청 도시계획과와 원만한 소통을 이뤄 400년전 종택의 모습 그대로를 완벽하게 복원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예요. 그리고 올해 서른 한살 된 아들에게 꼭 맞는 베필이 생겨 빨리 며느리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서계 박세당은
실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서계 박세당은 31세 때 과거에 장원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예조·병조좌랑과 사간원 잠언, 사헌부 지형, 암행어사에 홍문관 학사 등을 두루 지내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러나 옮은 일을 위해 직언을 마다않았던 강직한 성품으로 당쟁과 유학자들의 공허한 논란에 염증을 느끼고 39세에 수락산 석천동에 은거했다. 이후 ‘색경’과 ‘사변록’ 등의 저술을 남겼다.
서계는 바로 이 책들로 인해 이단자로 규정되고, 둘째 아들 박태보가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유배 중 객사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바로 이 서계의 사상이 펼쳐진 곳이 서계 종택이다. 서계 당대에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로 이뤄진 조선후기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전통적 구조를 갖춘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상당수 건물이 소실되고 안채마저 퇴락해 지금은 사당이 있는 영각(보수작업 이뤄짐)과 사랑채만 남아있다.
서계의 12대 종손인 박용우 서계문화재단 이사장은 서계 종택 일대를 전통마을로 복원·재정립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한편 책자발간, 전시회 등을 통해 서계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는 문화사업도 벌이고 있다.
# 종가의 문화유산·생활상까지 그대로
광명시 오리 이원익 종가
‘종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제사일 것이다. 왜냐하면 종가에서는 아직도 일년에 십 여 차례 이상 제사를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리 이원익 종가의 경우 간소하게 지내라는 그의 유언으로 현재 후손들이 제사의 부담이 없이 한 차례만 지내고 있다.
오리 선생은 조선시대 선조·광해군·인조 등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청백리다. 조선시대 대표적 유학자로 불합리한 조세제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대동법(大同法)을 주창하기도 했다.
두 칸짜리 초가집도 넉넉히 여겼다던 오리 정승의 370년 전 유언에 따라 종택을 박물관으로 꾸며 뭇사람들에게 종가의 아름다운 풍습을 널리 나누고 싶은 종부의 넉넉함이 박물관 곳곳에 배어난다.
충현박물관은 오리(梧里) 이원익 선생(李元翼·1546∼1634)이 남긴 문화 유산을 훌륭하게 지켜온 공로로 지난 2008년 12월 대한민국문화유산상을 받은 함금자 관장( 대 종부)이 가문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일반인들에게 종가의 생활상과 고건축물의 미학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 지난 2003년 문을 열었다.
국내 첫 종가박물관인 충현박물관은 현재 경기도 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된 오리 선생의 사저인 관감당과 후손이 살던 종택,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1호 오리영우(梧里影宇) 등 7개의 건축물을 포함하고 있다.
또 오리 선생의 영정(影幀) 4점을 비롯해 친필, 임금의 교서, 문집 등 27점의 유물과 후손들이 사용하던 각종 유물 1천500여점이 함께 전시돼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 500년 세월 품은 군포 동래정씨 동래부원군파 종택
소박한 아름다움 조상의 향취 그대로
수리산 초입에서 갈치 저수지가 낮게 펼쳐진 삼거리를 돌아 들어가면 돌과 흙, 기와가 올려진 고풍스런 담장이 보인다. 한여름 마당 가득했던 꽃들은 자취를 감췄지만 소담하게 둘러친 담을 돌아 얌전하게 앉아있는 눈 풍경이 진경이다.
바로 군포시 속달동 수리산 자락에 위치한 동래정씨부원군파 종택(경기도문화재자료 제95)은 조선조부터 유학자 집안으로 삼정승을 무려 17명이나 배출한 유서깊은 가문.
가문의 위세에 비해서는 소박하지만 고풍스런 멋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은 조선조 문신인 정난종의 큰 아들 정광보가 들어와 살며 지은 집으로 500년이 넘는 나이를 자랑한다.
종택은 정씨 후손이 이 지역에 자리를 잡고 사는 근거가 됐다. 종택 일대는 사패지(賜牌地, 고려ㆍ조선 시대에, 임금이 내려 준 논밭)로 가문의 파시조인 동래군(東來君) 정난종(鄭蘭宗, 1433~1489) 선생묘 및 신도비 외 묘역일원(경기도기념물 제115호)가 자리하고 있다.
종택의 사랑채는 고종 14년인 1877년에 지어졌고, 안채는 사랑채보다 100여년전인 1783년(정조 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건물이다. 초당과 외양간은 6·25전쟁 때 소실되고, 사당은 1960년대에 훼손됐으나 최근 복원했다.
방앗간이 있던 바깥 행랑채는 1970년대에 무너졌으나 복구작업을 거쳐 현재는 아담한 종택의 면모를 뽐내고 있다.
#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황희정승의 맥을 잇다
파주시 탄현면 장수황씨 종가
조선시대를 통털어 명 정승으로 대대손손 이름을 알리고 있는 방촌(尨村) 황희(黃喜)정승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으로써 정승의 덕목을 가문과 종중에 전파하고자 노력하는 장수 황씨(長水 黃氏) 황희정승 제21대 종손 황두하씨.
황희정승의 묘역이 있는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엔 사당과 함께 제향을 드리기 위해 의복 등을 갈아입는 원모제 등 건축물이 있다. 바로 종중에서 음력 2월7일(기제사), 2월10일(한신제), 8월8일(영모제)를 비롯 설과 추석 등 명절을 포함해 일년에 5회에 걸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곳.
이 곳서 만난 황두하씨는 “비록 종손과 종부가 종택을 짓고 기거하는 종가집은 아니지만, 황희정승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데 정성을 다한다”며 “설을 앞두고 여느 여염집이나 마찬가지로 분주하겠지만, 종가의 설맞이는 특히 제사음식에 오랜만에 모인 종중 어르신들 맞이에 일가친척들의 안부까지 챙기느라 눈코뜰새가 없다”고 말했다.
황씨 종가의 뿌리는 중국 절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씨(黃氏)의 도시조(都始祖) 황락(黃洛)은 중국 절강(浙江) 사람으로 후한의 유신(儒臣)이다. 28년(신라 유리왕 5)에 한(漢)나라 장군으로 교지국(交趾國, 베트남)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풍랑을 만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 월송정에 해당하는 안아진(安我鎭)에 표류하여 그곳에 정착, 세거한 것이 시초라 할 수 있다.
주요 세거지로는 포천시 청산면 대전리와 파주시 임진면 사취리,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상리·대하리·수봉리, 전남 장흥군 대덕면 덕산리, 전북 무주군 부남면 유평리 및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충남 보령시 웅천면 황교리, 황해 연백군 송봉면 노정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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