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대포, 속을 뒤집어놓다
인천시 중구 송월동은 자유공원을 품고 있는 응봉산의 뒷편에 있다. 산 뒤편에서 조용히 인천 앞바다를 바라다보고 있는 송월동은 어머니 품과 같은 동네다. 긴 항해를 마친 뱃사람들과 수십리를 달려 온 철마가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공포(空砲)와 공포(恐怖)
일제가 1905년 1월 1일 응봉산 정상에 관측장비를 갖춘 인천측우소 청사를 세웠다. ‘꽝’, ‘꽈앙~’ 100년 전 응봉산에서 쏜 대포굉음이 매일 인천시내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학생들은 책보따리에서 도시락을 꺼내들고 노동자들은 기계를 멈추고 식당으로 향했다.
대포소리가 난 시간은 정각 12시. 바로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해방 전 만해도 시계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 관측소에서는 매일 정오에 대포로 공포를 쏘았다. 당시로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정오에 대포를 쏜다해서 흔히 응봉산을 오포산(午砲山)이라고 불렀다.
대포 소리에 맞춰 밥은 먹었겠지만 속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시각을 알려준다는 명분 아래 오포를 쏘았다고 하지만,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경기(驚氣)가 날 정도로 심한 소음이었을 것이다.
짜증스러운 스트레스의 차원을 넘어서 식민지 민초들에게 가하는 무언의 으름장이었다.
▲한국 최초 지진관측 시발점
기상대 건물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몇 차례의 증축 등을 거쳐 모습이 바뀌었다. 눈길을 끄는 건물은 본관 옆에 있는 작은 빨간 벽돌집이다. 현재는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언뜻 봐도 100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1960년대에 세워진 건물로 알고 있어요. 한동안 방으로 쓴 것 같은데 불탄 흔적도 있어요.” 기상대 이성출 팀장의 설명이다. 일각에서 이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기상대 측은 청사 증축을 위해 이 건물 철거문제로 고민에 빠져있다.
벽돌집 옆에 ‘인천교통방송’ 간판이 붙어 있는 작은 부스가 있다. 교통방송의 날씨정보 리포터가 근무한다. 2시 55분이 되자 리포터 박윤선씨가 헤드폰을 낀 채 잠시 적막. “네, 날씨 정보입니다. 인천지방 현재 맑은 가운데 기온은 영상 15도이며….” 1분가량의 예보가 막힘없다.
바다로는 서해중부 앞바다까지가 관활지역으로 20명이 근무하는 기상대를 막 나서는데 정문 옆의 ‘세계지진관측망 인천관측소’라는 작은 푯말에 눈길이 갔다. 이곳이 바로 한국최초 지진관측 시발점. 1905년 3월24일 인천관측소 안의 작은 방공호에 기계식 지진계가 설치되었다. 이 관측소는 지난해 3월 천안함 사건으로 뉴스에 보도되면서 시선을 끌었다. 그날 이 관측기에 백령도 앞바다의 수중음파가 기록된 것이다.
▲애경그룹이 시작된 곳
기상대 정문 앞으로 내려가면 건너편에 자유 유치원이 있다. 산 끝자락 가파른 곳에 서 있어 바다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원래 이 자리는 독일 상인 파울 바우만의 주택이 있었다. 우아한 서양식 2층 석조 건축물로 러일전쟁 직후인 1906~7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을 두 번이나 지낸 사이토 마고토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구한말 인근에 외국인들이 살고 있어서 송월동은 신문물을 빨리 받아들인 동네다. 그 중의 하나가 비누다.
인천서 비누를 처음 만든 것은 1895년경이지만 본격적인 비누공장이 세워진 것은 1912년 일본인 ‘오다’가 송월동에 ‘애경사(愛敬社)’를 설립하면서 부터다. 1954년 채몽인씨(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의 남편)가 이 공장을 인수해 ‘애경유지공업㈜’를 창립해 종업원 50명과 함께 비누사업을 시작했다.
‘애경’은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미향’이란 브랜드의 비누만 한 달에 100만개를 팔아 당시 경인국도를 달리는 차량 대부분이 애경유지 트럭이었다는 일화를 남겼다. 이것이 오늘날 애경그룹의 모태다.
▲기차여행의 추억 장소
인천역은 송월동 동선 안에 있다. 지금부터 꼭 111년 전 이곳에서 기적이 울렸다. 이 땅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경인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이곳을 인천사람들은 ‘하인천역’이라고 부른다. 동인천역이 한때 상인천역이라 불린 것에 대한 댓구다. 지금의 역사(驛舍)는 1960년 9월 17일에 건립된 이후 특별한 ‘성형’을 하지 않은 그대로다.
경인선 중에 이만한 순수함을 지닌 역사는 없다. 덕분에 지난해 인기 드라마 ‘대물’의 촬영장소로 헌팅돼 고현정이 인천역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인천역’이란 간판을 가리운 채….
현재 하루 296회 상·하행선이 운행된다. 하루 이용객은 7천명에 달한다. 첫차는 오전 5시에 떠나고 막차는 밤 12시 39분에 들어온다. 매일 밤 막차에는 여지없이 제 역을 지나친 취객들이 적지 않다.
인천역을 출발한 열차는 이제 서울을 지나 경기도의 소요산역 까지 내처 달린다. 장장 2시간 30분이 걸리는 긴 여행길이다. 먼 길을 달려온 경인선 기차는 엄마 품 같은 인천역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출발 신호음과 함께 어김없이 다시 길을 나선다.
글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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