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무너지니 당색·파벌을 초월한 탕평정치도 사라지고…
정치적 군주·학문적 스승임을 자임하며
다산을 다그쳤던 정조의 문제의식까지
18년 유배기간 학문적으로 풀어내
당시 정치권의 한계이자 시대적 한계를
후대를 위해 저작이란 방식으로 극복
하늘이 무너졌다. 믿을 수 없었다. 정조 대왕이 죽다니. 불과 며칠 전 내게 사람을 보내오지 않았던가.
1800년 봄, 다산 정약용은 적들의 칼날을 피해 가족을 거느리고 낙향해 있었다. 천주교의 감화를 받았지만 제사문제가 어긋나고 나라에서 금지하므로 관계를 끊었노라고 해명했지만, 정적들은 공격을 계속했다. 정조의 비호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시샘에 더욱 공격을 해댔다. 다산은 차라리 한강변 고향 마현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런데 정조 임금에게서 사람이 왔다. 곧 불러 책 편찬의 일을 맡기고 싶다는 임금의 뜻을 전했다. 임금이 보내신 <한서선> 10질과 함께였다. 정조의 각별한 총애에 다산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바로 6월12일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인 28일 돌아가셨다니. 노론의 세상에서 남인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정조였다. 남인이라면 정조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정조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다. 한서선>
정조는 죽기 7일전 병상에서 탕평과 의리를 이야기했다. 의리란 옛 의리와 지금의 의리 두 가지일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탕평은 <서경(書經)> 에 나온 말이다.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널리 고루 미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자면 임금이 극을 똑바로 세워야 한다. 임금이 공정하지 못하고 편당되면 탕평이 제대로 될 수 없다. 서경(書經)>
정조는 그보다 며칠 전, 신하들에게 8년 주기로 세 정승을 번갈아 등용하는 자신을 원칙을 밝혔다.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에서 벽파에게는 의리를 고수하여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을 덕목으로 치켜세우며 주문했던 정조였다.
정조는 노론의 군주도, 소론의 군주도, 남인의 군주도 아니었다. 정조는 노론이든 소론이든 남인이든, 시파든 벽파든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당파를 아우르려고 했다. 각자의 의리, 고금의 의리가 서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리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러자면 개별 의리를 초월하는 수준 높은 의리를 필요로 했다. 정조는 각 정파의 편협한 파당적 흐름과 맞서면서 또 아우르면서 군주의 의리를 강력히 세우고자 했던 탕평군주였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은 그 자체가 정국의 최대변수였다. 탕평정국을 힘들게 주재하던 주재자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7월4일, 어린 임금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곧바로 3정승으로 심환지, 이시수, 서용보를 임명했다. 노론 벽파가 주도하는 정권이었다. 당색과 파벌을 초월하려는 군주 정조가 주재하는 탕평정국은 정조의 죽음으로 끝났다. 주재자의 자리엔 정순왕후가 차지했다.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로 벽파의 연원인 김귀주의 누이였다. 탕평정국에서 함께 하던 각 정파가 이제 각축이 노골화되었다. 주도권은 이미 노론 벽파에게 있었다.
노론 벽파는 정조 후반에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한 영남만인소에 동조하여 정면 대결했던 서유린 형제를 공격했다. 나름 순차적으로 약한 고리부터 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정순왕후 수렴청정 초반에 가장 우선적으로 공을 들인 공격대상은 채제공이 키운 세력이었다. 바로 이가환, 정약용 등이었다.
9월23일, 인동지역 장시경 사건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안핵사 이서구의 보고가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영남 남인세력의 노론 정권에 대한 오래된 반감이 깔려 있었다. 또 보고에는 채제공의 아들인 채홍원이 의관을 국문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는 소문이 정조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서구의 보고로만 보면 해프닝 비슷하게 끝난 사건이었지만, 노론 벽파에게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바로 채홍원에 대한 처벌요구가 일어났다.
이때 공격 구실로 천주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벽파가 공격한 채홍원, 홍낙임, 윤행임등 천주교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채제공도 천주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채제공이 키웠던 남인계열 인사들은 천주교와 직접 간접으로 연결이 되었다. 그래서 천주교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채제공에 대해서도 천주교도들을 비호했다는 구실로 탄핵했다.
1801년 1월10일, 대비 정순왕후는 사학(邪學) 엄금을 하교했다. 대략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왕(先王: 정조)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성해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 이른바 사학(邪學)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상황을 진단한 다음 사학을 계속하는 사람은 역률(逆律)을 적용할 테니 지방 수령들은 엄중하게 다스리라고 명을 내리고 있다. 천주교에 대한 강경한 탄압책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어서 발생한 것이 이른바 ‘신유사옥’(입장에 따라 ‘신유교난’, ‘신유박해’라 부름)이었다. 2월9일, 사헌부에서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3흉인으로 지목하여 의금부에서 추국할 것을 요구하는 탄핵상소를 올렸다. 대왕대비의 전교로 바로 잡아다 국문을 시작했다. 이가환은 옥사하고, 정약용은 영남 장기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어서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은 천주교와 관련된 것으로 공격받아 사사 당했다. 홍봉한의 아들이며 정조 친모 혜경궁의 동생인 홍낙임도 그 배후로 지목되어 함께 사사당하였다. 정조의 근신으로 육성되었던 윤행임은 서얼 윤가기 등의 흉서사건의 배후라는 죄목으로 사사되었다. 이때 윤가기의 사돈인 박제가도 유배당하였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국문을 받은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죽음의 칼날을 그토록 조심했던 다산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내건 것이 이를 말해준다. 여유당이란 호는 노자 <도덕경> 15장에서 따온 것이다. 개념정의를 피하는 화법에 따라 도를 터득한 선비의 모습을 형용하여 놓았는데, 그 첫 대목이다. “머뭇머뭇, 겨울시내를 건너듯(與兮 若冬涉川) 조심조심, 사방을 두려워하듯(猶兮 若畏四?)” 도덕경>
이렇게 조심했지만, 죽음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했다. 다행히 천신만고 끝에 목숨만은 건져 유배길에 올랐다. 그는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유배기간을 벼슬을 하느라 전념하지 못했던 학문을 위한 기간으로 삼았다. “이제야 겨를을 얻었구나!” 그리하여 18년간 유배기간 동안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여기에는 10년 위의 나이로 정치적 군주이자 학문적 스승을 자임하며 다산을 다그쳤던 정조의 문제의식이 녹아들어 있었다.
과연 정조의 정치는 어떤 것이었나? 정조는 평소 경법(經法)과 권도(權道)를 말했고, 비밀어찰을 통해 노련한 군주의 통치술을 구사했다. 현실 정치는 복잡하게 얽혀있고, 이에 대응하는 정조의 통치수단이 고단수였다는 점에서 쉽게 논단하기는 어려운 문제라 생각한다. 정조의 정치로, 당파와 파당적 이익을 초월한 탕평정치와 함께 정(正)의 정치를 들 수 있다.
정순왕후의 하교에서도 인용했듯이, 정조는 늘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서로 적대하는 쟁단에 대해서도, “진실로 군자의 도가 자라고 소인의 도가 소멸한다면 무슨 쟁단을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오직 그 원기(元氣)가 부실함으로 인하여 객기(客氣)의 침범이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는 척사(斥邪)를 명분으로 피를 부르는 살벌한 정치와는 기운이 다르다. 또 스스로의 문제점을 외면하고 외부의 남만 탓하는 무책임한 정치와는 수준이 다르다.
이러한 정조의 정치가 정조가 죽자마자 왜곡되었다. 먼저 정순왕후나 파벌적 권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벽파는 탕평을 유지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취약한 세력부터 제거하면서 궁극적으로 독점적 전권을 휘어잡고자 했다.
또 정을 강조하는 정조의 인내심과 차원 높은 해결책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정조가 부정(扶正)에 두었던 방점은 척사(斥邪)로 옮겨졌다. 파당적 이익에 따라 상대를 올가미로 걸어서 제거하는 것이 목표일 뿐 그것이 갖는 의미를 헤아릴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옥사를 일으켜 자파의 세력 확장에 부심했던 공안 세력은 결국 5년 만에 강력한 라이벌 노론 시파인 김조순에 의해 제거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정치의 기반은 협소해지고 그 질은 떨어졌다. 정조가 추구했던 정치는 사라졌다.
우리는 정조가 더 살았다면, 하는 진한 아쉬움을 갖는다. 49세였으니까, 영조가 83세까지 살았던 것에 비하면 너무도 돌연한 죽음이었다. 독살설이 나오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그런데 정조의 정치의 문제점은 없었는가? 나아가 정조의 정치가 추구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정조의 시대는 칭송하면서 그 이후의 시대는 암흑의 시대로 묘사하여 마치 역사가 단절된 것처럼 설명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정조의 군주로서의 탁월함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한계를 살펴보는 것이 역사를 살피는 자의 자세가 아닐까?
대개 그것은 정조 개인의 한계라기보다는 당시 정치권의 한계, 또는 시대의 한계일 수도 있다. 정조의 죽음은 한 영명한 군주의 시도가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종료했음을 의미한다. 역사에서 영웅이란 있다. 그러나 역사는 영웅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정조의 죽음으로 끝난 시대적 한계를 다산은 저작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극복을 시도했다. 우리는 영웅을 칭송하며 당대를 한탄할 것이 아니라 역사를 다각적으로 반성하면서 오늘의 문제를 극복할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할 것이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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