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
부끄러움이 많은 소년은 화가가 꿈이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림도 잘 그렸다. 그런데 어른이 된 소년의 손에는 붓 대신 분필이 쥐어져 있었다. 선생님이 된 청년은 군 제대 후 친구의 소개로 동갑내기 아내를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아내는 결혼반지를 빼서 남편의 학비를 마련해주고, 남편의 반 아이 등록금으로 첫 아이 돌잔치 비용을 선뜻 내주던 착하디 착한 동반자였다. 그런 아내가 위암으로 죽었다. 핏덩이 같이 아들, 딸을 놓고 말이다. 아내는 자신의 눈을 다른 이에게 기증해달라는 말을 남기로 하늘로 간 서른두살의 꽃다운 아내였다.
아내를 보내고 남자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남자의 슬픔 마음은 1986년 ‘접시꽃 당신’(실천문학사) 시집으로 다시 태어났다.
도종환 시인(57)은 아내가 하늘로 간 서른두살에 스타시인이 됐다. 그 후 25년 동안 100만부가 팔렸고 아직도 매년 5천부~1만부씩 판매되며 ‘국민시집’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 사이 시인도 50대 후반의 중년 아저씨가 됐고 얼마 전엔 며느리도 봤다.
시 한편으로 전국민의 눈물샘을 훔쳤던 도종환 시인이 5년만에 열번째 시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刊)을 냈다. 9년 째 충북 보은군 속리산의 오두막집 ‘구구산방’(龜龜山房·거북이처럼 느리게 살자)에서 꽃, 바람, 다람쥐, 잡초와 같이 살며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있는 시인을 만나는 일은 예상했던 것 보다 덜 어려웠다.
9월 7일 찾은 시인의 청주시 개신동 자택은 가을 냄새가 짙게 났다.
■12시에서 1시 사이
이 가을, 시인 특유의 달달한 시 세계를 기대했다면 조금 아쉬움이 있을 신작이다.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시인은 “인생을 시간으로 정리해보면 과연 나는 지금 몇시쯤 와 있을까?”하는 질문에서 작품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치열했던 12~1시를 지난 지금은 서쪽 하늘에 찬란한 노을이 펼쳐질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오후 3시쯤 내가 머물고 있다. 비록 캄캄한 어둠이 찾아 온다고 지난 12시부터 1시 사이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이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내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하고 살자는 마음이 이 시집을 통해 하고 싶은 메시지다.”
시인 배창환은 발문에서 “대구 학생운동의 메카로 불렸던 ‘곡주 할매집’ 뒷방과 청주 영운동 이층집에서 문학과 시대현실을 밤새워 토론하면서 곧 의기투합해 ‘분단시대’ 문학동인을 전격 결성해 민족민중문학운동의 대열에 합류했던 때는 낮 열두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달콤한 시들의 뒤편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치열한 ‘삶의 파편’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맞고 벽지로 좌천되고 해직, 구속으로 이어진 고통과 절망의 극점에 섰던 때가 오후 한시쯤이리라. 그리고 과로와 심신쇠약으로 쓰러져 학교를 그만두고 입산해 새로운 도(道)를 만나던 때가 오후 두시. 다시금 몸을 일으켜 진보적 문학운동단체의 든든한 중심으로 매주 하산과 입산을 번갈아가면서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마련하기 시작한 때가 오후 세시 무렵….
그 어떤 이들보다 치열했던 80년대, 상처많은 30대를 보내 시인.
“시대와 함께 문학을 끌어안고 살아왔다는 것에 후회는 없다. 단 사회적 실천을 위해서 가족들에게 무책임했던 것이 미안하다. 책임 속에 무책임함…. 직업을 빼앗기고 감옥에 가고 가족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가족들의 희생을 소홀하게 생각했다.”
사회운동가로 전교조 교사로 사회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그는 시를 통해 더 단단해지고 거침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갔다.
“두려움은 다 있다. 한 번 발언하고, 행동할 때마다 거대한 권력의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한 차별 등이 바로바로 오니깐 두렵지 않은 것 아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 때문에 주눅들거나 위축들지 않은다. 어떤 것이 공정한건가, 바른건가 발언하는 건 작가의 역할이다. 작가의 당연한 역할이다. 불공정함에 대해서, 자연파괴, 생명경시 등에 대해 때마다 발언하는 것이 당연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조선시대 ‘책문(策問)’ 정신을 강조했다.
“조선시대 ‘책문’이라는 시험 과정이 있었다. 과거시험의 최종단계로 왕이 국가 현안에 대한 계책을 묻고 이에 답하게 하는 시험이 바로 책문이다. 그런데 왕에 대해 직언을 하게 되면 과거급제는 커녕 목숨마저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마니 선비들의 고민이 컸을 것이다. 그래도 진실을 말하는 조선 선비의 불요불굴의 기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문학하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시대에 저항했던 그의 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떤 이는 그를 ‘당대 최고 로맨티스트이자 서정시인’이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슬픔을 파는 시인’이라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도 있다.
어쩌면 그는 어두운 시대를 담담하게 대항하며 ‘담쟁이’처럼 살아왔고 그래서 그의 시는 치열하고 비장하다. 서정시인의 얼굴은 일부일 수도 있다.
■3시 이후
이번 시집에서도 그의 단짝 ‘꽃’은 빠지지 않았다.
“송악초등학교 담 옆 채송화 연로날 꽃잎 속으로 작은 벌 한 마리가 붕붕거리며 날아들어갑니다 탱탱한 날갯짓 소리가 몸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채송화는 얼마나 가슴이 콩당거렸을까요?”(‘채송화’ 중에서)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꿈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은다”(‘라일락꽃’ 중에서)
“내가 처음 눈을 열어 세상을 보았을 때/거기 꽃밭이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지금도 내 옷소매에 소박한 향기가 묻어 있는 것이”(‘꽃밭’ 중에서)
이처럼 꽃은 시인과 함께 한다. 어머와 같이 꽃밭에 있었고 아장아장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 발걸음마다 채송화가 기우뚱거리며 따라왔다고 시인은 작품에서 이야기한다.
아내에 대한 절절한 마음 담은 ‘접시꽃 당신’
‘초판’ 정도 생각…결과는 100만부 대박
이번 신작에는 시인의 사유대상이 자연, 생명, 환경에 다양해짐을 알 수 있다. 카이스트생 자살사건에 대해 “젖은 꽃잎 비에 다시 젖으며 수직으로 떨어져내렸다”라고 표현했고 중국 쓰촨성 지진은 “돌더미 밑에서 갓난아이 하나를 구해냈지요/그녀는 젖을 꺼내 아이에게 물렸지요/살아 있는 모든 아이의 어머니”라고 정리했다.
또 시련을 담금질이라고 생각하는 시인은 더불어 살아가는 청안한 삶을 꿈꾼다. 오랜 시간 산속에서 생활한 시인은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에도 의미를 두고 흔들리며 피는 꽃 한송이에도 애정을 담는다.
■5시 이후
굽이 많은 생을 지나온 시인은 어느덧 오후에 접어들었다. 인생의 오후에 접어든 그에게 ‘접시꽃 당신’은 어떤 의미일까.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시인의 이름을 얻고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요즘도 문학강연이나, 학교강연을 가보면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초판본 시집을 들고와 사인해달라는 학생들을 보면 세월을 느낀다. 어느새 부모가 자식한테 물려주는 시집이 됐다.”
시인은 집필 당시 ‘접시꽃 당신’이 히트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걸 시집으로 내도 될까? 욕이나 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자고 요청이 와도 “어떻게 이걸 시집으로 내냐”며 거절했었다. 1985년 말, 실천문학사 편집자인 김사인 시인(현 동덕여대 교수)이 부인을 보낸 마음을 정리하고 넘어가자는 차원에서 권유했다. 그냥 초판 정도 생각했다. 그동안 한해도 쉬지 않고 해마다 5천~1만권씩 판매돼 100만부를 넘었다니, 예상하지 못환 일이다. 고마울따름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인생의 길을 묻으면 답을 알려준다고 했다. 간혹 그 길이 힘들어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 그가 시를 쓰는 이유라고 한다.
다섯시 이후 그의 시가, 그의 얼굴이 어떤 그림일지 알 수 없다. 단, 분명한 건 시인은 역사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뒹굴며 치열하게 숨쉴 것이다.
글_강현숙기자 mom1209@ekgib.com
사진_전형민기자 hmjeon@ekgib.com
도종환 시인은?
부드러우면서도 곧은 시인, 앞에는 아름다운 서정을 두고 뒤에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를 두고 끝내 그것을 일치시키는 시인으로 불리는 도종환 시인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시 ‘어떤 마을’이, 고등학교 문학 국어교과서에 ‘흔들리며 피는 꽃’, ‘옥수수 밭 옆에 당신을 묻고’, ‘담쟁이’ 등 여러 편의 시와 산문이 실려 있어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신동엽 창작상, 2006년 올해의 예술상(문학부문), 정지용문학상, 윤동주상 문학 부문 대상, 아름다운 작가상 등을 수상했고, 2006년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동안 펴낸 시집으로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해인으로 가는 길’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마음의 쉼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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