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열하는 사막의 태양이 서쪽 지평선으로 떨어지자, 온 천지는 담홍색 황혼으로 물들어갔다. 폭염을 피해서 건물 안에 칩거하던 주민들은 당연한 하루의 일과인 양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삼삼오오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며 한낮에 포식한 사막의 열기를 삽상한 허공 속으로 토해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찬란한 별빛 아래서 펼쳐지는 저들의 일상적 놀이 문화는, 어쩌면 멀리 우리네 선조들의 영고(迎鼓)나 무천(舞天), 아니면 옛 그리스의 아폴로 제전이나 디오니소스 제전의 모습,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하는 연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지난 ‘90년대 초 우즈베키스탄의 고도(古都) 부하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느꼈던 인상 중에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의 하나다. 기실 사막의 황혼은 더없이 고혹적(蠱惑的)이다. 산악지대인 우리의 노을녁은 짧지만, 일망무제의 사막지대의 노을녁은 길다. 해가 지고도 한 시간여 이상을 붉은 황혼이 대지를 떠나지 않는다. 아스라이 시야의 끝자락엔 오아시스 도시의 진기한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고적들이 실루엣처럼 펼쳐지고, 마침 찬란한 모자이크의 이슬람 사원 앞을 산책하는 두 연인의 모습이라도 은은한 황혼에 투영될 때면, 낯선 이방인들은 이내 순수무구한 아름다움과 끝없는 환상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나는 며칠 전 또 우즈베키스탄의 역사 도시들을 다녀왔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 등의 중앙아시아를 고집스레 드나든 지 20년째를 마감하겠다는 뜻으로 그곳을 찾았다. 인생의 황혼으로 접어들면서 그간의 얽힌 일들을 하나하나 덜어가기로 작정하다보니, 중앙아시아와의 인연도 이제 정리해야지 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번 방문에서도 저간의 결심은 여지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동서문화교류사에서 석국(石國)으로 알려졌던 타슈켄트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강국이라고 알려진 사마르칸드의 아프라지압 고구려 사신벽화 앞에서, 안국(安國)으로 표기됐던 부하라의 대상(隊商)숙박소나 아름드리 뽕나무 고목들을 마주하면서 나의 계획은 맥없이 흔들리고 말았다.
거두절미 실크로드로 알려진 사막의 동서문명교류의 통로는 우리네 문화와 역사의 뿌리를 정립해 볼 정보의 보고이자 무한한 상상력을 길어올릴 환상의 수원지들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역사문화와 직간접으로 연결된 지역이자 문명들임에도, 지금까지 우리와는 ‘죽의 장막’,‘철의 장막’ 등의 시대적 제약으로 오랫동안 미지의 대륙[terra incognita]으로 격리됐던 지역이 곧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문화권이다.
이제 중앙아시아로의 문은 활짝 열려졌다. 수백 년간 타임캡슐 속에서 잠들어 있던 실크로드 문화의 원형들이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화와 예술의 보물창고, 역사와 전설과 민담과 상상력의 저수지인 문명의 이색지대가 우리에게 그 신비스런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실로 야망에 불타는 ?은 세대의 입장에서는 가슴 설레는 역사적 전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사마르칸드의 장엄한 사원 앞 레기스탄 광장에 서서 잠시 천오백여 년 전 신라의 한 유랑연예집단의 머나먼 여정의 애환을 회상하며 야릇한 상념에 젖어들었다.‘속독(束毒)’이라는 제목으로 신라 말 최치원이 쓴 한시의 내용이 곧 그들의 행각이었다. 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한 옛 소그디아(sogdia) 왕국을 한자로 속독이라고 표기하는데, 이곳 소그디아 왕국의 연예인들이 파미르를 넘고 중원을 거쳐서 멀리 황금의 나라 신라에까지 갖은 곡절을 겪으면서 당도했다. 아시아 대륙을 소재로 한, 대 로망의 소재가 될 가슴 벅찬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상상력의 원천 실크로드는 그런 곳이다.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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