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11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아파트 문에는 크고 작은 광고 전단지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대부분 통닭집과 중국집에서 배달음식을 알리는 전단지였다. 그런데 화려한 전단지들 사이로 눈에 띄는 복사지가 있었다. A4용지에 손글씨가 빼곡한 흑백의 전단지였다.
내용은 ‘껍질 채 드시는 사과를 구입해달라’는 것. 사인펜으로 또박또박 쓴 필체에서 간절함이 묻어났다. 읽어보니 사과는 직접 ‘정성을 다해서 기른 것’이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사과보다 전단지의 편집디자인에 있었다.
애플의 로고처럼 그려 넣은 사과 그림과 사인펜으로 여러 번 겹쳐 써서 굵게 처리한 ‘껍질 채 드시는 사과’라는 헤드카피, 그리고 ‘경상도 산골 대적 꿀 부사’라는 서브카피가 눈길을 끌었다. 바디카피는 행을 바꾼 뒤, ‘당구장 표시(※)’옆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꿀 부사가 왔어요’라며, 세 가지 장점을 열거했다. 맨 아래쪽에는 밤 10시까지 주문 배달한다며 핸드폰 번호를 크게 써두었다.
과일장수 전단지서 느낀 감동
전단지의 광고주는 작은 트럭에 사과를 싣고 아파트 주변을 도는 과일 장수였다. 이 소박한 전단지에는 광고의 기본 요소가 다 들어 있었다. 그가 광고카피를 뽑는 법이나 편집디자인을 배웠을 리 없다. 그럼에도 구매자에게 어필하기 위해 시각이미지를 그려 넣고 서체에 변화를 주며 강조할 부분에는 동그라미까지 쳐서 보고 읽기 쉽게 편집했다.
나는 문득 스스로 서예와 사군자를 즐겼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생전에 가장 아름답게 봤다는 글씨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추운 겨울에 군고구마 장사가 삐뚤삐뚤 써 붙인 ‘군고구마 팝니다’라는 글씨였다. 그 글씨는 삶의 진솔함과 절박함으로 쓴 것이었다.
과일장수의 전단지가 그랬다. 가슴이 짠했다. 편집디자인의 원초적인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사과를 팔고자 하는 마음이 낳은 절실한 편집디자인, 서체의 변화와 주목성, 전단지에 압축한 카피 등을 찬찬히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갖출 건 모두 갖추고 있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책의 세련된 표지디자인도 따지고 보면 과일장수의 전단지처럼 소박한 디자인으로 출발했다. 오랜 세월의 담금질 속에 지금처럼 탄탄한 체형으로 자리 잡았다.
표지는 책의 압축 파일
과일장수의 전단지는 판로를 개척하기 위한 판매 전략의 하나이기도 하다. 직접 키운 사과인 만큼 자신감에 차서 한자 한자 써내려간 표지디자인도 독자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고도의 디자인 스킬이 구사된 시각적인 판매 전략이기는 마찬가지다. 비록 과일장수의 전단지가 수작업의 산물이고, 책이 기계적인 공정을 거친다는 차이가 있지만 독자와 소통하고자 하는 점에서는 목적이 동일하다. 또 과일장수가 전단지를 만드는 마음과 편집자나 북디자이너가 책을 만드는 마음은 결코 다르지 않다.
책은 ‘보고’, ‘읽는’ 매체다. 출판사에서는 특히 ‘보고’에 주목한다. 보기 좋고 읽기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담당자들은 책의 미려한 체형 관리에 최선을 다한다. 표지디자인은 단순히 원고를 디자인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궁극적으로 표지디자인은 독자의 마음을 디자인한다. 독서는 표지에서 시작하여 표지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지는 책의 껍질이 아니다. 표지는 내용의 뜨거운 압축파일이다. 한번쯤 미술작품을 감상하듯이 표지디자인을 감상해보자. 표지디자인을 보면 책이 보인다.
정민영 출판사 아트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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