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동안 산신제를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고, 유교문화의 보존마을로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마을의 가치가 높아지는 마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 위치한 ‘선비마을’이다.
이곳은 해주 오씨의 집성촌으로 5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해온 전통역사마을이다.
최근 마을 주민들은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소중한 역사자원을 훼손하지 않고 마을의 전통문화를 지켜나가면서도 마을의 소득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이 마을은 지난 2007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역사마을 가꾸기 사업’에 선정되면서 3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지난해 본격적으로 외부와의 소통을 시작했다.
■
문화·역사마을 가꾸기 사업은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우리 삶의 터전인 마을 문화를, 지역 주민의 자발적 참여로 마을의 문화·역사적 소재를 발굴·육성, 관광자원화해 문화와 환경이 아름답게 조화된 자생력 있는 마을로 조성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추진한 사업이다. 문광부는 각 도별로 1개 마을씩을 선정했으며, 경기도를 대표해서 덕봉리가 전국에서 13번째 대상 마을로 지정됐다.
실제로 경기도는 지난 2005년 안성시 청룡마을, 2006년 군포시 대야미 마을 외 2개 마을을 추천했으나 선정되지 못했다. 당시 덕봉리는 집성촌으로, 종중을 중심이 되어 주민단결력이 견고하고, 덕봉서원을 비롯한 오정방 고택, 경앙사 등 전통가옥과 마을내 연못, 정자, 공동우물터, 고성산 등 문화자원이 풍부하며 아직도 산신제, 석전대제 등의 전통행사와 국말이국밥 등 전통음식도 잘 보존돼 있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
사업 대상지 지정과 함께 국·도·시비 각 5억원씩 총사업비 15억원이 투입됐다. 이에 따라 사회적기업 이장이 수립한 기본계획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조성사업이 시작됐다. 마을회관을 리모델링 해 ‘선비마을 체험관’과 한옥 숙박이 가능한 ‘백련재’를 건립했으며, 기존의 백련정, 백련지, 큰우물 등을 재정비했다. 편의시설로는 친환경 주차장 및 체험마당이 조성됐고, 주변 조경 경관을 활용한 주변 정비사업도 진행됐다.
특히 관광객들이 선비정신과 선비생활사 옛 풍속 재현 등을 체험할 수 있는 20여종의 체험프로그램도 개발됐다.
이렇게 3년여의 준비를 거쳐 덕봉리는 역사문화체험마을에 걸맞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두루 갖췄다. 남은 건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들이느냐의 문제뿐. 마을 내부적으로는 운영주체 발굴의 문제였고, 외부적으로는 관광객 유치의 문제였다.
사업 시작 3년차에 접어드는 시점인 지난 29일 찾은 덕봉리 선비마을은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
사업 개시 원년인 2010년. 씨족 공동체답게 사업운영주체 발굴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농협에서 근무를 하다 퇴직한 오세익씨가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자연스럽게 부녀회와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운영조직이 꾸려졌다. 하루 인건비는 단돈 2만원, 적은 액수였지만 마을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일을 거들었다.
첫 해 치곤 성과도 나쁘진 않았다. 고작해야 몇몇 유학자나 풍수지리학자들이 다녀가는 것이 전부였던 마을에 2천여명의 관광객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장밋빛 희망도 잠시, 사람들의 발길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생활에 보탬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가깝다고 무작정 나오라는 것도 한두번이지. 다들 입에 풀칠 하느라 바쁜데…. 지금은 하려는 사람이 없어 걱정입니다.”
지난해 초 전국을 휩쓴 구제역은 이곳을 찾는 관관객들의 발길을 끊게 만들었고, 수입규모가 변변치 않자 운영위원들조차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최근에는 위원회 일을 도맡아 하던 사무장마저 농사일을 이유로 뒤로 물러난 실정이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되니까 참여하기가 어렵죠. 처음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고 하니까 나갔지만, 관광객들도 많이 오지 않을뿐더러 내 코가 석잔데 어떻게 나갑니까?”
마을 주민 오세준씨(56)의 말처럼 경제적 빈곤 앞에 씨족 공동체의 유대감은 뒤로 밀리고 말았다.
■
15억이나 들여 만든 체험시설이 애물딴지가 될 위기에서 오 위원장뿐만 아니라 안성시와 안성지역내 농촌관광 활성화를 위해 출범한 (사)농촌관광 커뮤니티 비지니스 센터(CB 센터)는 타계책을 찾기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댔다.
오 위원장은 ‘선비마을’과 연계해서 새로운 수입원을 창출하기 위해 내년에는 시 예산 1천500만원을 지원받아 연꽃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연꽃을 가꿔 마을 경관도 개선하고, 연입쌈밥 만들기 프로그램 등을 개발해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의도다.
이와 함께 안성시는 지역내 8개 농촌관광 마을들의 유기적 협력체가 될 CB센터를 지원함으로써 시 전반적인 농촌관광 활성화를 꾀할 방침이다.
이소영 안성시 테마마을 담당자는 “덕봉리 선비마을의 경우 시작단계부터 다수 주민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한 한계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내년부터는 최대한 많은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업들을 구상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주민들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CB 센터 또한 안성의 특성에 맞는 농촌관광 모델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김상현 CB 센터 컨설팅 전문위원은 “지역 구성원들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해당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 지역의 관광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지역 전체가 관광을 통해 경제적 혜택을 공유하는 것이 지역사회관광의 기본 개념”이라며 “지역사회관광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시스템 구축 초기부터 지역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현실성있는 계획을 도출함은 물론, 지역 주체의 역량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행정기관이나 전문가 집단은 기본 계획 수립에 그치지 않고 본 계획과 관련한 다양한 정부정책 사업 유치에 관여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주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
안성 선비마을을 지속 가능한 역사마을로 보존하면서 관광경쟁력을 유지하는 핵심은 씨족 공동체 규범에 있다. 마을의 정신적 지주가 돼 온 가문은 물론이고 외지에 나가 있는 후손들도 돌아와 가문의 전통을 지켜 나가고 싶은 곳으로 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대로 유지해 온 마을의 전통문화를 관광객의 일회성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싸구려 관광자원으로 내몰아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 관광객의 수요에 맞는 관광이 아닌 마을 특성에 맞는 관광으로 방향을 잡아 나가야 한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여러 번 방문해야 마을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곳 선비마을에 와야만이 맛 볼 수 있는 전통콘텐츠의 개발이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백 년 이어온 공동체 규범이 살아 있는 마을은 가 보고 싶은 마을이 아니라 살아 보고 싶은 전통마을로 남아야 한다. 이를 통해 제2, 제3의 전통마을이 자생적으로 살아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윤철원기자 ycw@kyeonggi.com 사진=전형민기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